임숙재

환경을 다스리시오

by 남지만 작가

12월, 벌써 중순입니다.
이 마지막 달은 단순히 시간의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해 동안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노력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희미해진 초심을 다시 벼려낼 '결의의 시간'입니다.
거리를 수놓는 조명과 흘러나오는 캐럴은 휴식의 유혹이기도 하지만, 제게는 낭비할 수 없는 마지막 기회임을 알리는 경고등처럼 느껴집니다.
이 중요한 기로에서, 저는 언제나 '그녀'의 삶의 궤적을 꺼내어 비추어봅니다.
그녀의 생애는 찰나의 성공으로 빛나기보다는, 묵묵하고 끈기 있는 '과정의 미학'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연초의 원대한 계획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흐지부지되기 쉬운 연말, 저는 그녀의 그 자세를 빌려 묵은 숙제들을 마침표까지 끌고 가고자 합니다.

충남 예산의 고즈넉한 마을, 이야기는 한 송이 꽃처럼 어여쁜 처녀로부터 조용히 싹트기 시작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어둠이 막 드리우기 시작하던 그 시절, 그녀는 겨우 열일곱의 나이에 가마를 탔습니다.
세상의 순리대로 따뜻한 보금자리와 소박한 행복을 꿈꾸었을 그녀의 시간, 그러나 그 행복은 찰나처럼 짧았습니다.
결혼한 지 채 두 해가 되기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닥쳐 사랑하는 서방님을 잃었습니다.
꽃다운 열아홉, 그녀는 세상이 가장 가혹하게 부르는 이름, '청상과부'라는 운명을 홀로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를 늘 조용히 따라다녔습니다.
"저리 젊은 나이에 불쌍해서 어쩌나, " "나이가 아깝다"는 연민과 동정.
그것은 위로였지만, 어린 그녀에게는 오히려 견디기 힘든 족쇄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 연민의 시선들이 그녀를 세상의 변두리에 묶어 두는 밧줄 같았겠지요.
홀로 남겨진 고난의 무게, 혹독한 시련 앞에서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쏟아내도 마르지 않는 듯한 눈물 속에서, 그녀의 청춘은 혹독하게 시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문득 굳건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는 비장한 결심이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방 안,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았습니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 그것은 그녀를 '청상과부'라는 틀에 가두는 마지막 미련이자 과거였습니다.
가위를 들어 주저 없이 싹둑, 자신의 머리채를 잘라냈을 때, 그녀는 세상의 동정과 운명의 사슬을 함께 끊어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를 구할 것이다."
서방이 없는 시댁, 돌아갈 곳 없는 친정.
그녀에게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새로운 생을 찾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품고, 그녀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느린 기차가 실어 나른 것은 한 여인의 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향하는 비장한 의지, 그리고 운명을 거역하려는 굳센 용기였습니다.

낯설고 물선 서울 생활은 열아홉 과부에게 녹록지 않았습니다.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남의 집 빨래를 하며, 손끝이 닳아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부유한 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녀는 그 집에서 '열정'과 '성실'이라는 두 글자를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그녀의 꾸준한 성실함은 주인 부부의 마음을 움직였고 깊은 신뢰를 얻었습니다.
인정 많은 주인 어르신은 젊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나이도 젊은데,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해보라."
이 순간, 그녀는 평생을 기다려 온 듯 조심스럽게 두 가지 간절한 소원을 꺼냈습니다.
첫째는 늦었지만 야간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 둘째는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안식을 넘어, 영혼과 지성을 채우고자 하는 그녀의 갈망이었습니다.
주인 어르신은 그녀의 기특한 생각에 감동하며 그 소원을 흔쾌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했고, 주일에는 교회에 출석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 어르신의 은혜에 감읍(感泣)한 그녀는 갑절로 열심히 일했고, 밤에는 학교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운명을 거역한 노력은 놀라운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녀는 장학생이 되었고, 마침내 스물두 살(1913년)에 숙명고등여학교를 졸업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배움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1917년), 그녀의 모교는 그녀를 일본 유학이라는 파격적인 기회 속에 밀어 넣어 주었습니다.
식모살이를 하던 시골 처녀가 일본 도쿄여자사범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연락선을 타고 부산 포구에 내린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신문에서는 예산의 시골 과부가 당대의 명사 윤심덕처럼 현대적이고 멋진 신여성으로 귀국했다고 대서특필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서른 살(1921년), 고난이 빚어낸 지성과 세련미는 비로소 찬란하게 빛을 발했습니다.
모교 교사를 거쳐 조선총독부 장학사까지 지낸 그녀는, 해방 후 숙명여자전문대학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그녀가 학업을 통해 새로운 삶을 개척했던 바로 그 학교가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될 때, 초대 총장으로 취임합니다.
이 '숙명(淑明)'이라는 교명에는 깊은 뜻과 역사적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1906년 대한제국 황실이 학교를 설립할 때 고종 황제가 직접 하사한 이름, '맑고 밝은 지혜(淑)'와 '빼어난 지식(明)'을 갖춘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라는 시대적 소명을 담고 있습니다.
임숙재는 바로 이 황실이 내린 '맑고 밝은 지혜를 향한 숙명'의 가치를 온 삶으로 실현해 낸 것입니다.
그녀는 바로 임숙재(任淑宰) 총장입니다.
열아홉 살의 과부에서 대학 총장까지, 그녀는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숙명(宿命) 자체를 바꾸어 놓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임숙재 총장은 늘 제자들에게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환경을 다스리시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삶은 인간에게 잠재된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을 몸소 보여준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사람은 어떤 환경이나 위치에 처해 있든,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이겨내고 다스려 가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임 총장께서 만약 열아홉에 청상과부가 되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시골 주부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닥친 위기(危機)는 때로 복(福)의 통로(通路)가 되어 인생역전의 고귀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훌륭한 교훈을 그녀는 남겼습니다.
임숙재 총장의 극적인 일대기를 살펴보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내 안에도 숨겨진 잠재력이 있는데, 혹시 지금 스스로를 모른 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들을 찾아내고 빛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닐까요.



*알고 가기;
임숙재는 친일파로 분류됩니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에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
-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 전쟁 협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친일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활동에도 참여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결전부인대회 연사 등).


*이 글을 게재하기에 앞서, 임숙재 총장의 친일 행적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깊이 숙고했습니다.
친일 행적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역사적 과오이며, 그 심각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기록과 인물의 기여도를 분리하여 객관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교육적인 관점에서, 그녀가 남긴 특정 업적이나 전문 분야에서의 성취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으며, 이러한 부분들을 배움의 자료로 삼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저는 그녀의 친일 행적을 전제하고 인지하면서도, 후대에 귀감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민감한 사안에 대한 고심 어린 결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바라며, 독자 여러분 또한 역사적 비판의식과 교육적 가치를 동시에 견지하며 읽어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