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겨울날, 나만의 ‘세한도’를 그리다
세상은 잠시도 멈추어 서지 않습니다.
눈을 뜨면 마주하는 아침의 볕이 어제의 그것과 다르고, 강변의 물길이 매 순간 그 모양을 달리하듯, 우주는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을 쉽니다.
생물학적 진화의 비밀을 파헤친 찰스 다윈은 일찍이 생존의 법칙을 설파했습니다.
살아남는 자는 가장 힘센 자도, 가장 영민한 자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직 변화라는 파도에 몸을 싣고 그 흐름에 가장 유연하게 적응하는 종만이 대지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준엄한 원칙이었습니다.
이는 비단 야생의 법칙뿐만이 아닙니다.
현대의 거인 빌 게이츠 역시 자신의 성공 신화 뒤에는 천부적인 재능보다 '날마다 새롭게 변하고자 했던 치열한 노력'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았던가요.
변화(Change)라는 단어의 마지막 철자 'g'를 가만히 획 하나만 바꾸어 'c'로 고치면 기회(Chance)가 됩니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변화의 본질 속에 기회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언어의 계시와도 같습니다.
변화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려는 이에게 세상은 무궁무진한 기회의 장을 열어주지만, 변화의 파고 앞에서 눈을 감고 모르는 체하는 이에게 세상은 차가운 도태의 그늘을 드리웁니다.
매일의 작은 변화에 깨어 있는 사람과 어제의 관습에 매몰된 사람 사이의 간극은, 마치 각도계의 중심에서 시작된 두 직선이 시간이 흐를수록 아득한 거리로 벌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다 생을 마감하며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탄식했던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변화를 외면한 채 오늘을 허비하는 우리 모두의 심장을 서늘하게 찌릅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예기치 못한 '구덩이'를 만납니다.
거침없이 흐르던 물줄기가 깊은 웅덩이에 가로막히듯, 우리의 삶 또한 시련과 역경이라는 거대한 함정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많은 이는 절망하며 벽을 긁어대고, 왜 내게 이런 불행이 닥쳤느냐며 하늘을 원망하곤 합니다.
하지만 발버둥 칠수록 몸에는 상처만 깊어질 뿐입니다.
갇힌 물이 구덩이를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기다림'과 '채움'에 있습니다.
물이 스스로를 차곡차곡 채워 구덩이의 턱을 넘어서는 그 순간까지, 침묵하며 내면을 다지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그릇은 바로 그 구덩이 속에서 증명됩니다.
조선의 선비 추사 김정희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참판에 오르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모함에 휘말려 제주도라는 고립된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진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추사는 그곳에서 한탄하는 대신 붓을 들었습니다.
벼루 열 개의 밑창이 나고 붓 천 자루가 닳아 뭉개질 때까지 그는 자신을 연마했습니다.
그 지독한 고독과 정진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회화사의 금자탑인 '세한도(歲寒圖)'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공자의 말처럼, 그는 인생의 가장 시린 겨울날에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를 화폭에 담아내며 자신을 완성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삶 또한 고난을 기회로 바꾼 위대한 증거입니다.
전남 강진에서의 18년 유배 생활은 절망과 분노로 점철될 수도 있었던 시간입니다.
그러나 다산은 그 깊은 구덩이를 학문의 정수를 길어 올리는 우물로 삼았습니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비롯한 수백 권의 저서는 그가 구덩이 속에서 흘린 눈물과 땀이 응축된 결정체였습니다.
그에게 유배지는 더 이상 유배지가 아니었으며, 시련은 오히려 다산이라는 거대한 학맥을 완성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조여 오는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성장을 멈추고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인간의 정신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사고의 신진대사를 거쳐 낡은 생각의 껍데기를 벗겨내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매너리즘이라는 무덤 속에 갇히게 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어제와 똑같은 반복처럼 느껴질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늘 새로운 변화의 싹이 움트고 있습니다.
그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고 스스로를 일깨우는 사람만이 더 큰 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구덩이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을 채워 넘쳐흐를 뿐입니다.
우리 역시 삶의 시련 앞에서 우물쭈물하기보다는, 그 시간을 내면의 힘을 기르는 축적의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고난을 견뎌내는 인내, 그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비로소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는 변절(變節)이 아닙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는 바로 변절입니다.
여기서 잠깐 변절에 대해 짚고 넘어가 봅시다.
겨울 산을 오르다 보면 눈보라 속에서도 꼿꼿이 서 있는 소나무를 만납니다.
사람들은 그 푸르름을 보며 '지조'를 말하고,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꺾인 가지를 보며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삶에서 그 '꺾임'은 단순히 물리적인 파손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변절'이라 부르며, 때로는 서늘한 경멸을, 때로는 깊은 탄식을 내뱉곤 합니다.
변절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제까지 목숨처럼 아끼던 신념의 옷을 벗어던지고, 전혀 다른 색깔의 옷으로 갈아입는 일입니다.
역사라는 거울 속에는 그 옷을 갈아입은 수많은 얼굴이 비칩니다.
독립의 서광이 보이지 않던 시절, 펜 끝을 돌려 일제를 찬양했던 천재 문인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지독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반면, 카이사르의 가슴에 칼을 꽂았던 브루투스의 손덜미에서는 개인의 의리와 국가의 대의 사이에서 진동하던 인간적인 고뇌를 읽기도 합니다.
사실 변절의 이면에는 인간의 가장 나약하고도 본능적인 민낯이 숨어 있습니다.
살을 파고드는 고문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끝까지 결기를 지키기란 범인(凡人)에게는 성인(聖人)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혹은 눈앞에 일렁이는 거대한 부와 권력의 유혹은 소리 없이 신념의 둑을 허물어뜨립니다.
때로는 자신이 믿어온 가치가 사실은 허상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오는 환멸이, 스스로를 변절의 길로 떠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절'과 '전향'을 엄격히 구분하고 싶어 합니다.
비겁하게 동료를 팔아넘긴 배신자와, 자신의 오류를 진실하게 깨닫고 새로운 길을 찾는 구도자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둘을 가르는 한 끗 차이는 '진정성'과 '염치'에 있습니다.
자신의 변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를 짓밟는 행위는 변절이지만, 아픈 성찰을 통해 더 나은 가치로 나아가는 것은 성숙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변절의 풍경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선거철마다 둥지를 옮기는 정치인의 행보에서, 혹은 이익을 좇아 신뢰를 저버리는 기업의 세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절을 목격합니다.
지조를 지키는 것이 '고지식함'으로 치부되고,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것이 '능력'으로 추앙받는 시대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지키는 이들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 있습니다.
변절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일관성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바람이 분다고 해서 뿌리째 뽑혀 나가는 나무는 숲을 이룰 수 없습니다.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는 것, 혹은 꺾일지언정 썩지 않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변절이라는 서글픈 단어 앞에서 다시금 되새겨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