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굽이굽이 돌아온 길, 풀꽃이 되기까지

by 남지만 작가


그의 시는 참 쉽습니다.
초등학생도 읽고 고개를 끄덕일 만큼 다정하고 매끄럽습니다.
하지만 그 매끄러운 시어들이 나오기까지, 나태주라는 한 사람의 생애는 투박한 자갈길과 깎아지른 절벽의 연속이었습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화려하게 등단했을 때만 해도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충청도 변두리의 젊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에게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밥을 먹여주지 않았습니다.
첫 시집을 내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종이를 살 돈조차 아까워 담배를 피우는 동료들이 버린 담뱃갑을 주워 모았습니다.
그 좁고 빳빳한 은박지 위에 연필로 시를 꾹꾹 눌러썼습니다.
그렇게 눈물겹게 모은 시들을 묶어 세상에 내놓은 첫 시집 <대숲 아래서>.

대숲 아래서 (중략)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제는 보고 싶다 전화도 했었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더 멀리 있는 그대
대숲 아래 서서
대숲 아래 서서 생각하노니
인생은 가도 가도 혼자 가는 길...

하지만 세상은 냉담했습니다.
서점에 깔린 그의 책은 단 한 권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름 없는 시골 교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서점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시집들은 결국 '반품'이라는 이름의 사형 선고를 받고 시인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팔리지 않아 돌아온 자신의 분신 같은 책들을 보며 쓰디쓴 가난과 무명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독자의 사랑에 목말라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의 구멍 난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소년에게 세상은 거대한 얼음장 같았습니다.
새어머니 밑에서 눈치를 보며 자란 소년은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을까"를 평생의 숙제로 안고 살았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정작 본인은 연애 한 번 못 해보는 못난이였지만, 남의 마음을 얻기 위해 대신 써준 글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글은 나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구나.'

그리움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인생의 파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007년,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를 써온 그에게 췌장염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췌장이 녹아내리고 장기가 멈추어 가던 혼수상태 속에서, 그는 저승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었습니다.
당시 지인들은 이미 부고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적처럼 눈을 떴습니다.
6개월간의 긴 투병 끝에 다시 마주한 세상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병실 창가에 핀 이름 없는 풀꽃 하나, 곁을 지키는 아내의 지친 얼굴...
그 모든 것이 눈물이 날 만큼 예뻤습니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국민 시가 된 이 짧은 구절은 사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발견한 생명의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내가 죽음 앞에 서보니, 세상에 예쁘지 않은 것이 없고 귀하지 않은 존재가 없더라는 절절한 고백이었던 셈입니다.
지옥의 문턱을 함께 넘은 아내, 그 지독한 순애보로 이 파란만장한 생의 고비마다 그를 붙잡아준 것은 그의 아내였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평소 아내를 향해 "나의 신이고, 나의 종교이며, 나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그가 사경을 헤매던 6개월 동안, 아내는 단 하루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으니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미 썩어 들어가 냄새가 진동하는 남편의 몸을 매일같이 닦아내고, 의식 없는 남편의 귓가에 끊임없이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 시 더 써야 하잖아. 아직 못다 한 말이 많잖아."
사실 아내는 남편이 시를 쓰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시인 남편 대신 집안 살림을 챙기고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자 아내는 남편의 '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명줄을 깎아 기도했습니다.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기적적으로 깨어난 나태주 시인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초췌하다 못해 반쪽이 된 아내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랑'과 '아름다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더러운 몸을 닦아주던 아내의 거친 손마디에 있었다는 것을요.
지금도 시인은 아내에게 매일같이 고백을 아끼지 않습니다.
한때는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이제는 아내를 향한 시를 멈추지 않습니다.

가장 예쁜 생각

담장 밑에 피어난 민들레 꽃송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가만히 눈 맞추는 생각
(중략)


아침에 자고 일어난 아내의 부스스한 머리칼을 보고
고생했구나, 마음 아파하며 손으로 만져주는 생각
그런 생각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생각입니다.

오늘날 그는 '역주행의 아이콘'이라 불립니다.
등단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일찍 유명해졌다면 시건방진 시를 썼을 것"이라며 허허 웃습니다.
팔리지 않는 시집을 안고 울먹이던 청년 교사는 이제 없습니다.
대신 수많은 청춘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그의 삶이 파란만장했기에, 그리고 그 곁을 지킨 아내의 단단한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의 시 한 줄에서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나도 그랬단다"라는 묵직한 위로를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너를 아끼며 살아라'는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다정한 유언과도 같습니다.
인생은 가도 가도 혼자 가는 길이라지만, 그 길 위에서 스스로를 대접하고 아끼는 마음만 있다면 그 여정은 충분히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
시인이 담뱃갑 은박지에 꾹꾹 눌러썼던 그 간절한 마음으로, 이제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당부합니다.
“오늘 하루, 거울 속의 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라.
고생했다고, 너는 참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것이 네가 이 세상을 향해 피워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풀꽃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