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는 시간에 대한 단상

by 남지만 작가

오늘은 벌써 26년 2월 1일입니다.
매번 느끼지만 참 세월은 빠르기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우리를 지나쳐 간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심해(深海) 속을 유영하는 작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목격하는 별빛은 수만 년 전 과거가 쏘아 올린 잔영이며,
그 빛이 나의 눈동자에 닿는 순간 비로소 '현재'라는 기적적인 조우가 완성됩니다.
이처럼 세상은 지나가 버린 과거와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가 서로의 꼬리를 문 채 억겁의 세월을 견디며, 우리 앞에 단 한 조각의 '지금'을 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얼마나 경이로운 모순입니까.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시한부의 운명을 살면서도, 사랑하는 이의 눈을 마주할 때만큼은 시간이 영원히 박제될 수 있다고 믿는 무모한 낭만주의자들입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지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그 순간의 향기를 온 우주에 선언하기 위함이며, 파도가 모래사장을 덮치는 것은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 바다가 육지에게 건네는 뜨거운 안부의 반복입니다.
우주의 나이를 24시간으로 환산한다면 인류의 문명은 단 1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불꽃놀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찰나의 불꽃 속에서 우리는 베토벤의 운명을 듣고, 칸트의 별이 빛나는 하늘을 사유하며, 이름 모를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시간의 길이가 압도적이라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생의 농도마저 희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정된 시간이라는 틀이 있기에, 우리가 나누는 "안녕"이라는 인사는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어떤 전파보다도 묵직한 진동을 남깁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팽창하며 멀어지고, 엔트로피의 법칙은 모든 것을 낡고 허물어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마음의 결은 물리적인 시간의 화살을 거스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느꼈던 안온함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지친 중년의 어깨 위로 내려앉고, 첫사랑의 서툰 고백은 낡은 사진첩 속에서 여전히 파릇한 새싹의 빛깔로 살아 숨 쉽니다.
시간은 육신을 노쇠하게 만들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단 몇 초의 기억만으로도 남은 평생을 버텨낼 영혼의 양식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웃 이여, 시간이 당신을 갉아먹고 있다고 느끼며 슬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걷는 모든 발걸음은 대지에 새기는 고유한 문장이며, 당신이 내뱉는 모든 숨결은 대기 속에 녹아들어 지구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잉크가 됩니다.
우리는 거대한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가는 수동적인 파편이 아니라, 그 파도의 정점에서 하얗게 부서지며 빛을 발하는 가장 역동적인 포말(泡沫)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폭넓은 세상에서 배워야 할 유일한 진리는 미래를 저당 잡아 현재를 희생하는 법이 아니라, 억겁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오늘'이라는 경이로운 선물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만끽하는 법입니다.
지금 당신의 손목시계가 가리키는 그 무심한 초침 소리는, 사실 우주가 당신에게 보내는 가장 열렬한 응원이자 살아있음의 북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멈추지 않는 강물, 그 찰나를 붙잡는 사유의 그물.
우리는 흔히 시간을 시계 숫자의 움직임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똑똑 떨어지는 초침의 소리, 혹은 달력 한 장이 넘어가는 물리적인 간격으로 말이죠. 하지만 철학의 렌즈로 들여다본 시간은 그렇게 매정하고 딱딱한 눈금이 아닙니다.

현대 현상학의 아버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우리가 음악을 듣는 순간을 통해 시간의 신비를 포착했습니다.
'도(C)' 음이 들리고 이어 '레(D)' 음이 울릴 때, 만약 우리 의식이 ‘지금 이 순간’이라는 점에만 갇혀 있다면 우리는 결코 멜로디를 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후설은 말합니다.
우리 마음은 방금 지나간 음을 끈덕지게 붙들고 있으며(파지, Retention), 동시에 다음에 올 음을 무의식적으로 마중 나간다(예지, Protention)고요. 시간은 점들이 모인 선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용광로 속에서 끊임없이 뒤섞이는 끈적한 흐름인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우리가 시간을 '공간'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자를 가지고 길이를 재듯 시간을 나누는 것은 과학의 편의일 뿐, 삶의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는 이를 ‘지속(Durée)’이라 불렀습니다.
찻잔 속의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는 그 지루하고도 달콤한 시간은 시계의 5분과는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집니다.
베르그송에게 시간은 마디마디 끊어지는 대나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색을 바꾸며 흘러가는 노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장 치열하게 시간의 얼굴을 마주했던 이는 아마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일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아예 인간의 존재 양식 그 자체로 정의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는 인간을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미래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달려가며, 그 유한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에게 남은 시간’의 소중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더 이상 나를 늙게 만드는 냉혹한 파괴자가 아닙니다.
시간은 나의 기억이 머물고, 나의 기대가 뻗어 나가며, 나의 존재가 완성되어 가는 가장 입체적인 무대입니다.
결국 시간이란 시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내일의 나를 꿈꾸는 당신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