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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결과

by 매버지

몸 안에 박힌 작은 돌멩이 하나 덕분에, 나는 1년에 한 번씩 피검사와 초음파 검사를 받는다. 그리고 그 결과를 들으러 혜화의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비는 억수로 쏟아졌고, 마음은 조금 무거웠다. '별 거 없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최근 몇 달간 쌓인 스트레스가 내 몸 어딘가에 또 다른 흠집을 내지 않았을까 하는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학병원의 외래진료실은 늘 그렇듯 북적였다. 예약된 진료시간은 오후 3시 15분. 평소처럼 30분은 지연될걸 알았지만 30분 일찍 도착해 결국 한 시간을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 지루함을 견디다 문득 혈압 측정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전고혈압과 고혈압 1단계를 오가는 사람이다. 왠지 모를 두려운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혈압계에 팔을 집어넣고 버튼을 눌렀다. 젠장. 결과는 고혈압 2단계. 조금 전에 커피를 마신 탓일까? 아니면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일까? 이유를 찾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몸관리에 실패한 내 탓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진료 전에 이런 결과를 보고 나니 갑자기 진료실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졌다.


이윽고 내 대기번호인 B0258 이 전광판에 떴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던 담당의 선생님이 나를 힐끗 보더니 대뜸 내게 묻는다.


"매버지씨 무슨 일 있었어요?"


"네? 아니요... 별일 없었는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 수치가 좋아졌어요? 운동 열심히 하셨나 본데요? 전반적으로 작년에 비해 피검사 수치가 아주 좋아요. 물론 초음파에서 여전히 지방간이 조금 보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많이 좋아졌네요. 지금처럼만 하시면 됩니다. 1년 후에 다시 보죠!"


헐. 뭐지? 방금 전 혈압측정기의 수치가 무색하게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나니 어리둥절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진료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내내 자꾸만 고개가 갸웃거렸다. '진짜 좋아진 게 맞나?'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래도 '작년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나름 열심히 운동을 했었지'였다. 정확히 말해 그 시절동안 나는 내 몸을 유심히 돌봤다.


그 이후 4월부터 찾아온 허리 부상과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겹치며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몸을 돌보기보단 혹사했고, 마음도 조금씩 닳아갔다. 그렇게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몸을 방치하고 나서야 '이제 몸 좀 관리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직전 4개월의 노력이 지금 내 몸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뜻밖의 결과'는 지쳐 메말라가던 내 마음에 단비를 내려 주었다.


생각해 보면 노력이라는 건 늘 그 순간에는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운동을 해도 바로 살이 빠지는 것도 아니고, 건강식단을 지켜도 눈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자리에서 "좋아졌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몸이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그때 그렇게 하길 참 잘했구나'.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정말 단순한 확인 하나가 나를 더 생기 있게 만든다. 뜻밖의 결과는 그래서 참 고마운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노력이 어딘가에서 분명히 쌓여가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언제가 아주 조용히 나를 다시 믿게 해주는 증거로 나타나는 일은 참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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