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불러온 생각 #2
여행 중 바퀴벌레를 주제로 글을 쓰게 될 줄이야. 묵고 있는 리조트 방에 바퀴벌레가 출몰하였다. 내가 알고 있던 거대한 사이즈의 날아다니는 하와이 바퀴벌레는 아니었지만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내는 질겁을 하였다. 작은놈 한 마리는 내 손으로 때려잡았고, 작은놈의 3배 정도 하는 녀석은 벽을 타고 유유히 도망쳤다. 일단 방안 소독이 필요할 것 같아 리조트 측에 도움을 요청했고, 곧 해충 스프레이를 들고 직원이 도착했다. 벽에 데코를 위해 걸어둔 장식 뒤로 숨어 들어간 곳 주위에 집중적으로 스프레이를 뿌렸지만 녀석은 나오지 않았다. 직원은 언제든 또 나오면 불러달라며 돌아갔다. 결국 녀석은 잠에 들기 직전 다시 출몰해 내 손으로 다시 한번 때려잡아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아내의 바퀴벌레 불안은 시작되었다.
일단 장식장 위의 모든 물건들은 캐리어와 서랍으로 집어넣었다. 펼쳐 두었던 캐리어 역시 바퀴벌레가 들어갈지 모른다며 다시 닫았다. 이불속과 배게까지 체크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작은 바퀴벌레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 3명이 부산을 떨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고, 다음 날 자정까지 잠을 못 이루던 아내를 뒤로 한 채 나는 먼저 잠이 들었다. 새벽 2시 아내가 자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어.. 어? 무슨 일이야?"
"저기 벽이랑 천장 사이 데코에 바퀴벌레 있어!"
"뭐라고? 진짜?"
자다가 깬 눈을 비비며 핸드폰 후레시를 켜 가리키는 곳을 비춰보았다. 벌레 형태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또... 인가? 하... 일단 녀석은 다행히 움직이지 않았고 소파의자를 끌어다가 휴지로 눌러 잡았다. 그런데 잡고 보니 작은 나방이 아닌가? 허탈함과 동시에 짜증이 밀려왔다.
"나방이야! 정말... 바퀴벌레 포비아에 걸렸구먼!"
나방인 걸 확인한 아내는 그제야 한숨을 내쉰다. 새벽 2시 자다 깨 나방을 때려잡고 나니 잠은 달아나 버렸고, 어릴 적 내 삶 속에 스쳐 지나간 바퀴벌레와의 추억이 떠 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은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를 매매하기 위해 내놓았고 집 상태를 보기 위해 신혼부부가 찾아왔다. 맞벌이를 하시던 어머니는 집을 깨끗이 치운 뒤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신기하다, 그때는 집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에게도 무언가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신혼부부가 집에 도착해 집을 둘러보고 담소를 나누는데 어머니 옆으로 작은 바퀴벌레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매의 눈으로 바퀴벌레를 체크한 후 담소를 나누며 손으로 꾸욱 눌러 잡았다. 다행스럽게도 신혼부부에게는 들키지 않았고 난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엄마, 어떻게 바퀴벌레를 손으로 잡을 생각을 했어?"
"그럼 어떻게 해. 그 사람들이 바퀴벌레 때문에 집 안 산다고 하면 안 되잖아. 그래서 급하니까 손으로 잡았지. 엄마가 좋아서 그랬겠니."
그때 그런 엄마를 보며 속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저 정도의 독함(?)과 순발력이 필요한 건가. 여하튼 내 인생의 아주 강렬한 바퀴벌레와의 추억이다. 그리고 그렇게 호기롭게 바퀴벌레를 맨 손으로 때려잡던 30대의 어머니는 올해 70살이 되었다. 세월이 참 유수처럼 흘렀다.
바퀴벌레 입장에서 생각을 한 번 해보니 그들은 죄가 없다. 내가 어렵사리 도착한 이 숙소에 먼저 살고 있던 그들이다. 대대손손 하와이 빅아일랜드 땅에서 나고 자랐을 그들이다. 그렇게 잘 살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나를 만나 발견되어 생을 마감하게 된 두 마리의 바퀴벌레에게 심심한 애도를 보낸다.
그리고 불안에서 포비아까지 생긴 듯 한 아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영화 설국열차를 보면 바퀴벌레는 아주 고단백의 미래식량이야. 봉테일님이 그냥 그렇게 영화에 등장시키지 않았을 거야. 언젠가 우리가 먹게 될지도 모르는 그 녀석들을 좀 더 예쁘게(?) 바라보자고. 내가 너무한가? 그냥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는 거야. 수십만 배 더 큰 우리가 그들에겐 더욱 큰 공포일테니. 여행하는 동안 또 나타나면 내가 열심히 때려잡아 볼게. 내가 정식 불교도는 아니지만 불교 교리 '살생하지 말라'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말이야. 지구가 생겨난 이래 우리 선조보다 먼저 자리 잡고 살아오던 그들을 이제 삶의 동반충 정도로 생각하자고. 아무리 그래도 마음이 안 편해지나? 그래도 우리 여행을 바퀴벌레 때문에 망칠 순 없잖아? 이젠 새벽 2시에 바퀴벌레 때문에 깨우는 일은 없었으면 해. 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