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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나는 여행

예찬주의자

by 매버지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혼자 떠난 여행이 몇 번 되지 않는다. 운 좋게도 이해심 높은 아내 덕분에 작년과 올해 매년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작년에는 제주도, 올해는 일본이다(어쩌다 보니 둘 다 섬..). 재작년까지 회사에 묶인 몸으로 일을 했기에 휴가기간 동안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작년부터 전업주부가 된 후 이런 호사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내에게는 진지하게 말은 안 했지만 주변 친구들이 나를 많이 부러워한다. Tanx a lot.


싱글이었을 때엔 혼자 떠나는 여행을 계획한 적이 없었다. 2002년 유럽으로 떠난 배낭여행도 친구와 함께 회사 휴가 때면 친구와 연인 아니면 가족과 함께 어딘가를 향했다.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한 첫 직장을 퇴사하며 나는 혼자 제주도로 떠났다. 보통의 캐리어가 아닌 족히 1m가 넘는 프로 등산용 배낭을 어깨에 메고 제주도에 내리자 마자 둘레길 7코스를 걸었다. 점심 즈음부터 시작해 장장 5시간 넘게 꾸역꾸역 걷고 걸어 첫 번째 숙소 근처 슈퍼 앞에 널브러졌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500ml 맥주 한 캔을 원샷하고 나니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다. 정신을 차리고 첫 번째 숙소(게스트하우스)로 가자 같은 방의 앳된 20대 초중반의 학생 두 명이 나를 반겼다. 통성명을 한 뒤 'I'스럽지 않게 여행 첫날 호기로 저녁 약속이 없으면 근처 고깃집 가서 소주 한잔 하자고 권했는데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때가 30대 초반이었으니 망정이지 지금 그랬다면 '진짜 저 꼰대 왜 저래' 했을 듯. 지금 기억에 사회생활 5년 정도 먼저 해본 인간이라고 뭐라 뭐라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이후 연락처도 받고 또 보자 얼싸안고 헤어졌지만 그 이후론 본 적은 없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이를 하는 동안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생 첫 한라산 정상 등반을 함께했던 30대 셰프 커플부터 지금 생각하면 수배자인지도 모를 40대 중반의 터프한 형님까지 인연을 맺고 정을 나누었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느라 그들에게 신경 쓸 여력 따윈 남아있지 않았고 그렇게 인연은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당시 여행을 통해 담아낸 기억 중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어떤 둘레길 코스를 걷고 힘들게 산을 넘어 내려와 오르막 길에서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긴 데크길 중간에서 마주한 바다 위 석양이었다. 석양을 보고 한참 동안 멈춰 서 있다보니 갑자기 감정이 차올라 뜬금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 글을 읽는 아내가 이 사람이 이런 면도 있나 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다. 첫 번째 직장에서 사람 또는 일 때문에 힘들었던 많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 인생에 거쳐가는 수많은 흔적 중 하나 일 뿐 나를 뒤흔들 수 있는 일은 아니란 사실을 그때 직감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결혼을 했고 지금은 여섯 살 아이를 둔 아빠가 되었다. 열심히 일을 하며 지냈고 크고 작은 인생의 굴곡을 지나왔다. 그러다 작년 전업주부로 잠시 전향한 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떠난 제주도 여행은 싱글에 떠났던 첫 혼자 여행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떠나기 전 신경 써야 할 가족들이 서울에 남아 있었고, 여행을 가서도 가족들이 그리웠다. 혼자 있는 시간이 조금 어색해졌달까?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갔고 삼일쯤 돼서야 그 어색함이 사라졌지만 다음 날 나는 다시 서울로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홀로 있는 시간 동안 내 앞으로의 삶 그리고 가족들과의 미래를 심도 있게 그려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진 것 같다.


다시 시간이 흘러 며칠 전 4박 5일 동안 가졌던 혼자 떠난 일본여행은 매우 가치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일본여행은 그렇게 끌리지가 않아서 평균적으로 10년에 한 번 정도 갔던 것 같다. 결혼 후 아내와 떠난 일본 여행 이후 결혼 10주년이 지나 혼자 찾은 일본은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가졌던 일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싹 사라지는 여행이었다.

멀리서만 바라본 일본은 어떤 측면에서는 지극히 폐쇄적이고 문화와 경제적 동력을 잃어버린 시대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서 본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더 다양함을 추구하고 유구한 전통 역시 고수하며 경제적으로도 활기찬 모습이었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본의 건축물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양하게 섞여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 모습들이 전혀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다. 저마다의 특색을 살리려 노력하고 있었으며 음식 역시 일본음식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음식들이 현지화되어 펼쳐지는 모습이었다. 상상력의 측면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문화만 보더라도 얼마나 소재와 작화가 다양한지 알 수 있었고, 서점에서도 애니메이션이 전체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할 만큼 위용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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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들이 함께 운영하는 동네골목의 스시집, 고양이를 모티브로 한 에어비앤비, 로컬 베이커리


과거 관광지만 수동적으로 끌려다녔던 나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을 보고 느끼며 내 짧은 식견을 반성하게 되었고 어쩌면 이들에게 한국의 미래에 대한 힌트를 엿볼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동안 15년 아니 그 이전부터 우리는 인구구조상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현재의 일본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25년에 느낀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상황은 점점 그 실마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거리와 상점 곳곳에는 다소 고령자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선호하지 않을 만한 직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만난 일본의 젊은이들은 대체적으로 성실하게 본인의 삶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회사, 높은 연봉, 신분 상승과 같은 키워드가 점철된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조금 다른 현실적인 눈높이와 행복, 내가 일할 수 있음에 감사 등이 더 알맞게 조율된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초고속성장을 먼저 경험한 일본인들이 장기침체로 변화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조금 더 만족하며 살 수 있는 마인드를 장착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예찬한다. 여행지를 좀 더 섬세하게 느끼며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그를 통해 우리는 내가 가졌던 생각들을 점검해 볼 수 있고 앞으로 미래를 설계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기회와 여유가 된다면 혼자 떠나는 여행을 적극 추천한다. 그게 한국이든 해외든 상관은 없다. 어느 곳이든 새로운 자극은 널려있고, 내가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 있다면 충분히 누릴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1년에 한 번씩 떠나고 있는 혼자 여행을 아내에게 미리 허락받아야겠다. 여보, 나 내년에 또 가도 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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