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주의자
나는 청소년기와 20대 초중반 잘 웃지 못해 콤플렉스가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입만 웃고(그것도 한쪽 입꼬리만 올라갔다...) 눈은 웃지 않아서 10대와 20대 때 사진을 보면 대부분 건질 사진이 없다. 누나의 대학교 졸업식 사진을 볼 때면 활짝 웃고 있는 누나와 비교되어 늘 확 찢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사람들은 나만 보면 '화났냐?', '무슨 일 있냐?'라고 물었다. 당시엔 안경도 쓰지 않아서 눈빛이 '건방지다'는 말도 군대에서 많이 들었고, 말수도 매우 적어서 '불친절하다'는 오해를 받곤 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예전 내 글에서 딸아이의 친구 녀석이 했던 말처럼 아이가 세상에 나온 후로는 더욱 잘 웃는다. 이러한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내게 주어진 미션인 교육업무 때문에 강연을 위해 비언어적인 요소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그 시절 집에서 거울을 보며 웃거나 얼굴 근육을 움직여 표정을 풍부하게 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 더불어 결혼 후 살이 드라마틱하게 화악 찌는 바람에 자연스레 편안한 아재상(?)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예전 웃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나름 친절했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웃으며 먼저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배려나 친절을 시도했다. 예를 들면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을 발견하면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드리거나, 버스에서는 임산부나 노인이 타면 가장 먼저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학교에서 조금 따돌림을 당하거나 장난의 대상이 된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편이었다. 물론 그들 대신 싸워주지는 못했지만... 유년기부터 예를 지나치게 강조하신 할아버지 때문인지 측은지심이 강한 성격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내 삶은 꾸준히 친절모드를 켜 둔지 오래되었다.
잘 웃고 상대방에게 nice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친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예전에는 그랬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 친절을 선택적으로 베푸는 사람들도 많이 만난다. 상대방의 사회적 위치 또는 필요성에 따라 친절모드를 껐다 켰다 반복한다. 우리는 선택적 호의와 진정한 친절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의외로 말수가 적고 잘 웃지 못하는 사람 중 내면에는 친절함이 들끓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단지 성격상 또는 자라온 환경의 영향으로 표현력이 부족할 뿐이며 개인적으로 난 그런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이 가는 편이다.
나는 친절을 좋아하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하진 않다. 위에서 말한 부류와 기본적으로 배려심이 없는 사람, 폭력적인 사람,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친절을 베풀진 않는다. 어릴 적엔 나 역시 받은데로 돌려주거나 100분 토론을 제안했으나, 이젠 그럴 힘도 애정도 식어 무관심 또는 회피로 대응한다. 반대로 누구나 나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절은 베푸는 사람의 몫일뿐 내가 그것을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대부분 친절히 대했을 때 친절로 보답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얼마 전 동네의 인형뽑기방을 아이와 함께 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 누군가 카드를 놓고 갔길래 '누구 거지?'라고 생각만 하고 점포를 나와 아이와 원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소년 2명이 헐레벌떡 뛰어 와 우리를 붙잡았다. 아이들은 숨찬 목소리로 '저기~'하며 내가 발견했던 그 카드를 수줍게 건넸다. '미안하지만 내 카드가 아니야'라고 말하자 다시 천진난만한 얼굴로 '네~'하며 다시 인형뽑기방을 향해 뛰어가는 귀여운 두 소년을 보며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다는 성급한 일반화가 하고 싶었다.
나는 친절을 예찬한다. 앞으로도 되도록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고, 친절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더불어 최근 다소 어지러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친절의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친절이란 어떤 대가가 아니라, 도움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도움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