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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버지 Jul 09. 2024

가장은 남편이 아니라 주부다

전업주부 아빠의 다른 생각


  아빠가 아이 육아를 전담하고 주부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시대이다. 어린이집 정기상담에 아빠가 참여한 집은 나뿐이었고, 상담 도중 담임 선생님은 조심스레 육아의 주체(주양육자)를 물어보셨다. 부모 중 주양육자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보통 대낮에 놀이터에 가면 아빠가 아이와 함께 하는 집의 비율은 10명 중 1~2명 꼴이지 싶다. 나 역시 그들을 보며 동질감을 먼저 느끼기보다 힐끔거리는 걸 보면 남자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 스스로도 익숙않나 보다. 내 가까운 주변부터 내가 왜 일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고, 소수는 저 사람 이제 나이 들어 다시 회사 들어가긴 힘든가 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이걸 역으로 뒤집어 보면 주부를 매우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하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바깥일은 대단하고 큰 일, 집안일은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고루한 전통적인 관점이다.


나의 주부력을 여름 보양식과 제철음식으로 승화시킨다...


  주부(主婦)의 사전적 의미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서 꾸려가는 사람이다. 한자어를 한 단어씩 풀어보면 '주인 주'와 '며느리/아내 부'이다. 최근에는 주부 부를 '夫(남편 부)'자로 표기하기도 한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이제 남자가 집안일을 하는 것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 역시 주부로 지내며 주부에 대한 인식이 재정립되었고 정말 중요한 역할임을 통감한다. 동네에서 뵙는 모든 어머니와 주부들이 리 보이고 나 역시 아이 돌보기와 가사를 잘 해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더불어 전업주부로 지내며 예전과는 다르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먼저, 보통 가장은 경제활동을 하는 남편을 지칭하는데 실질적인 가장은 가정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주부다. 최근 남편들의 가사참여도가 높아지면서 가정적인 분들이 꽤 많이 늘었다.  지인 중에는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특유의 보수적이고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가정보다 회사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았다. 마치 야근을 훈장처럼 여기고 회식에 빠지는 건 사회생활을 포기한 것처럼 보았달까. 나 역시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회사에 몰두하다 보니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육아는커녕 아내와 대화 10분도 나누지 못한 채 잠들기 일쑤였다. 은연중 '나 그래도 바깥일 열심히 하고 돈 벌고 있는데 그럼 된 것 아니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최근 주부가 되어 가족이 최우선인 삶을 살아가 내린 결론은 내가 더 관심을 쏟고 돌보아야 하는 대상은 가족이라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중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그 가정은 많은 걱정과 어려움에 휩싸인다.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회사는 내가 야근을 덜하고 회식에 불참한다 해도 크게 나빠질 일이 없다. 전통적인 의미의 가장(長)은 보통 남편을 지칭하고 있는데,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대로라면 오히려 가정의 평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는 주부가 가장이라는 생각이다. 작년까지 맞벌이를 하며 육아를 했던 우리 부부는 '누가 더 회사 일이 힘드냐, 육아를 더했냐'라는 주제로 종종 다퉜다. 가장의 부재시기였다고 생각된다. 내가 전업주부가 된 이후부터 둘 다 그때보다 평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니 조금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다음으로, 직장인이었을 때 너무 바빠 스스로를 챙길 시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 합리화였다. 스타트업에 근무하는 동안 10시 출근 11시 퇴근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10살 이상 어린 주니어들이 넘쳐나는 스타트업에 대기업 금융회사 출신이 리더로 들어갔으니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일로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준비되지 않은 의미 없는 회의도 자주 했고, 끼니를 대충 때우며 몸에 좋지 않은 음식 섭취와 저녁식사 및 술자리도 늘어났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것이 내가 더 큰 성장을 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며 회사에 기여하는 것이라 합리화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서 날려 버린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건강이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나 자신과 가족은 전혀 챙기지 않은 삶을 최근 3년 가까이 살았다. 돌이켜보면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한 시간을 다 합쳐도 일주일도 안될 다. 나는 곧 회사였고 회사의 미래가 나의 미래라고 착각한 것이다.


  요즘 매일 하는 것 중 하나가 나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30분 정도 차분히 나를 돌이켜 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중요하지만 놓 것들이 보이고 보다 삶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서 예전과는 달리 하루하루 치유와 회복을 반복하는 중이다. 최근 점점 더 몸과 마음이 건강해짐을 느끼고 있다. 그 덕분인지 얼마 전 아이의 어린이집 친구 어머니를 놀이터에서 만났는데 대뜸 이런 말을 하셨다.


"재훈(가명)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잘 웃는 사람이 누구야?라고 물었는데 남자 중엔 OO아빠(매버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왜 아빠가 아니고 아저씨야?라고 재훈이에게 다시 물었더니 아빠는 잘 안 웃는다고 하네요. 그래도 재훈이 아빠가 잘 웃는 편인데 OO아빠는 늘 웃고 계셔서 그런가 보네요."


  웃음이 터져 나오며 내가 요새 늘 웃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했다. 놀이터에서 만나는 아이 친구들에게 몇 번 과자랑 음료수를 나눠 준 적은 있어도 딱히 잘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이의 시선에 그렇게 보였다니. 한편 전업주부로 지낸 6개월 동안 내가 조금은 변했구나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일과 사람 그리고 걱정에 찌들었던 내 얼굴에도 미소가 보인다니. 그날은 집에 돌아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웃는 표정을 재차 지어보곤 했다. 이왕지사 잘 웃는 아빠가 된 김에 앞으로도 쭈욱 그래 보아야지.


  마지막으로 아빠가 아이를 돌보고, 주부가 되는 것을 준비 중인 가정이 있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각다 많이 자신을 성장시킬 것이고, 가사활동은 경제활동 보다 더 큰 가치가 느껴질 수도 있다.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 느낀 가장의 무게를 더욱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게감은 단순한 버거움, 답답함이 아니라 충만함이 될 가능성이 높. 회사생활을 통해 집안경제를 이끌어 주고 있는 아내에게도 진심으로 깊은 감사함을 느끼며, 대한민국의 모든 전업주부 건투를 니다.


아이와 단 둘이 서울랜드를 다녀온 역사적인 그 날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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