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주의자
어릴 적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초등학생 시절 국어책을 읽는 단순한 발표를 할 때도 하기 전부터 긴장하고 발표를 하는 동안에도 떨리는 목소리가 제 귀에 거슬릴 정도였으니까. 선천적인 성격도 그러하거니와 누군가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몸이 긴장되어 굳어 버렸다. 아마 이런 내 모습은 대학생 때까지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대학교에서 팀 발표 수업을 할 때도 PPT 만들기부터 전반적 기획까지 가장 많이 참여했지만 발표는 다른 친구에게 맡겼다. 비록 발표자가 더 많은 점수를 받을 확률이 높을지언정 그게 내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입사 한 첫 직장에서 세일즈와 교육이라는 업무를 맡으며 성격과 반대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금융(보험) 세일즈 특성상 상품의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더불어 고객의 니즈를 이끌어내야 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세일즈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비언어적 요소인데 얼굴표정, 시선처리, 손동작 등을 잘 처리할 수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표정이나 시선처리도 훈련과 반복 끝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다행스러운 점은 보통 고객 한 명을 상대하고 사전에 고객정보를 최대한 확보해 어색해질 수 있는 순간을 대비할 수 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은 성과를 만들 수 있었다.
세일즈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 것은 교육(강의)이었다. 처음에는 내부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교육을 하게 되었다. 고객을 상대하는 모습을 눈여겨본 파트장이 목소리가 좋다며 원초적인 이유로 교육파트에 나를 추천한 것이다. 첫 강의는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한 상품강의였는데 강의일정이 잡힌 후부터 불안감에 매우 열심히 준비한 기억이 난다. 보험 상품의 특성상 어려운 의학용어가 많았고 정확히 상품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보험약관 책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했다. 인터넷으로 의학용어의 정의와 임상사례를 공부하고 해부학 이미지를 보며 신체기관의 존재이유와 병증 등을 파고들었다. 첫 강의를 무사히 마친 후 기존에 해당 상품 교육을 진행하셨던 선배님께서 내 강의평가를 본 후 본인이 더 이상 안 해도 되겠다는 말을 전달받았을 때 희열을 느꼈다. 이후 관련 업무로 이직과 관련 대학원 진학까지 한 후 창업까지 했으니 어쩌면 내 인생에서 꽤나 진지하게 몰두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업 이후 오래지 않아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업의 본질을 무시한 채 아이템에만 집착한 결과였다고 할까? 기업의 존립을 위해 간, 쓸게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지만 난 그러지 못했고, 내가 해낼 수 있다고 자부한 일들의 퀄리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일감을 준 담당자들의 니즈는 훨씬 더 복합적(?)이었으며 난 그것들을 평생 충족시켜 주며 업을 영위해 가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익숙한 금융회사에 다시 입사했고 이후 여러 회사에서 주어진 다양한 일들을 처리해 나가며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잠시 멈춤을 한 지금 내게 더 맞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했던 일들에서 좋아했던 요소들을 뽑아보니 '정보탐색, 분석, 전략수립'이란 키워드가 떠오른다.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보를 끌어다 모아 분석하고 현재 상황에 맞게 솔루션을 제시하는 과정에 가장 몰두하고 재미를 느꼈다. 어찌 보면 세일즈와 교육 업무에도 위와 같은 과정이 녹아들어 있었기에 스스로 더욱 열심히 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요소를 진행하는 배경이나 환경에 있어 턴키(turn key)로 업무를 맡았을 때 더욱 능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좋게 이야기를 하면 내가 맡은 일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과 책임감이 높은 편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누군가 어설프게 내 일에 토 다는 게 싫다는 말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러한 나의 성향을 간파한 관리자들은 내게 프로젝트에 대한 권한을 턴키로 넘기며 잘 활용했던 것 같다.
갑자기 이 글이 예찬주의자의 성격에 맞는지 의문이 들지만 나이 40대 중반에 들어서 진지하게 나를 돌이켜 보며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분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서는 이러한 나의 특성을 잘 활용해 보려 한다. 조금 일찍 이런 시간이 내게 찾아왔다면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짚고 넘어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가 좋아하는 일 대부분은 위와 유사한 요소들을 가미한 메커니즘으로 흘러가고 있다. 신기하게도 내 무의식은 이미 나를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이 또한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노력에서 기인한 결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