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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예찬주의자

by 매버지

어릴 적 나를 잠시 키워주셨던 외할머니 댁에는 대학생이었던 막내 외삼촌이 함께 살고 있었다. 삼촌 방에는 짙게 베인 담배 냄새와 더불어 오래된 집의 곰팡이 냄새가 어우러져 묘한 향기를 풍겼다. 그리고 춥고 작았던 그 방에 들어가면 마치 보물상자 안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삼촌은 음악을 좋아해서 테이프와 CD가 가득했으며, 나는 하나씩 꺼내 들으며 다양한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팝부터 클래식까지 다양한 음반을 수집했고, 1992년에 데뷔한 Radiohead의 "Creep"도 그때 처음 들었다. 음울한 보컬의 목소리를 헤드폰을 끼고 이불속에 파묻혀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좁은 방 한구석에는 삼촌이 읽다 둔 책들이 몇 권씩 놓여 있었는데, 그중 처음 접한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였다. 처음엔 두께에 압도되어 주저했지만 몇 장 읽다 보니 기존의 소설들과 달리 술술 읽히는 것이 흥미로웠다. 책을 집으로 몰래 가져와 며칠 만에 완독 했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후 학교에서 문학소년 중 하나였던 김구(김구 안경을 쓰고 다녔던 친구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와 책 내용을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 책은 20대 초반까지 내 책장에 자리했으며, 아무 페이지를 펼쳐도 30분은 빠져들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이 책을 왜 좋아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원초적인 이유부터 당시 환경까지 다양한 요인들이 떠올랐다.

먼저, 사춘기 소년이었던 내게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섹스신은 매우 흥미로웠다. 중학생 시절 몰래 야한 비디오를 보던 경험과는 달리, 글을 통해 상상하는 섹스는 아름답게 다가왔다. 현실적이면서도 은유가 가득한 묘사, 차분하지만 격정적인 서술이 자주 등장했는데 모두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절하다고 느껴졌다. 일부에서는 하루키를 '고급 야설 작가'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는 이미 대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소설에서 섹스는 중요한 요소였고,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상당히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이 책의 주요 소재인 죽음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중학생 시절, 나보다 한 살 어린 지인의 자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 앞동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는데 지인이었던 그녀였다. 명석하고 예뻤던 그녀는 시골에서 전학 온 천재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지만, 양쪽 부모님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되었고, 다른 학교로 전학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강제적인 분리는 사랑을 막지 못했고, 결국 한 명의 자살로 시작된 비극은 일주일 후 다른 한 명이 건너편 동에서 투신하며 마무리되었다. 특히, 나는 구급차가 오기 전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를 직접 목격한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인정받을 수 없던 사랑의 끝이 죽음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책 속의 주인공들 역시 친구 또는 부모의 죽음을 경험한다. 나는 가깝지 않은 지인의 자살에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주인공 와타나베가 친구 기즈키의 죽음을 겪은 후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허무함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공감됐다. 이후 친구이자 사랑했던 나오코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와타나베가 느꼈을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죽음이라는 개념이 아직 낯설었던 내게 지인의 죽음과 소설 속 죽음은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당시 한일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며 일본 음악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X-Japan, 아무로 나미에, GLAY, 우타다 히카루 등의 일본 가수들의 음악을 들으며 일본 음악도 괜찮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K-POP이 세계적으로 위상을 떨치고 있지만, 당시 일본 대중음악 시장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또한, 누나가 대학에서 일어교육을 전공하며 자연스럽게 일본 드라마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고, 그 영향으로 일본 문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문학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를 시작으로 무라카미 류, 에쿠니 가오리 등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하지만 그나마 재미있게 읽은 책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공저한 『냉정과 열정 사이』뿐이었다. 하루키의 다른 소설이나 수필은『상실의 시대』만큼 와닿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그의 다른 작품들은 판타지적 요소나 초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등 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상실의 시대』를 좋아한다. 확실한 것은 나는 이 책을 예찬했고, 지금은 예전만큼의 열정은 없지만 따뜻한 아랫목 같은 애정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책장에서 한참을 찾았지만, 결국 보이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누구에게 빌려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함께했으며,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한 책이기에 내게는 의미가 크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 책 덕분인지 모른다. 조만간 다시 구매해 읽어본다면 어떤 감정이 들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때 고등학교 친구 김구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다시 떠오르면 좋겠다.


https://youtu.be/B_RQv7OMJFI?si=irxSPutq7YP_Z-Zj

원제인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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