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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선불

부정적인 예언은 이제 그만

by 칼과나

부모 자식 관계에도 신뢰가 중요해. 그리고 그건 니 행동으로 쌓아나가야 하는 거야, 라고 말해왔다.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하고 놀 때 놀더라도 때가 되면 멈추고 나올줄 아는 첫째가 있어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그 말은 내가 믿음을 줄 수 있도록 니가 바뀌어야 비로소 너를 믿을거야, 라는 말과 같았다. 아이가 자기 생각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로 그런 방식으로 계속 관계를 맺어온 것 같다. 둘째가 선생님과 상담하다가 자기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고 칭찬을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 아이에게는 믿음을 선불로 주어야겠구나. 내가 믿도록 니가 행동해야 믿음을 주겠어, 같은 기브앤테이크가 아니구나.'


우리 팀장님이 나에게 '니가 실패하지 않길 바라서 그래',라면서 사사껀껀 '너 그렇게 하면 이렇게 실패할껄? 너 이렇게 하면 요렇게 실패할껄?' 앞서가며 걱정과 부정적인 의견을 뿌려댔다면 나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항상 믿을 수 있게 일 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내 실수로 일이 꼬여도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가 없을 수 있겠냐고 같이 해결하면 된다고 말하는 팀장님이라서 회사생활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하면서 내 아이에게 정 반대로 행동해온 걸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이 아이는 자기 평생 엄마에게 계속 그런 부정적인 의견을 들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지켜왔을까? 어떻게 그 와중에도 나를 계속 사랑해주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물론 오늘도 늦게까지 게임을 하다가 늦게 일어나고 학교 갔다오면 아무 곳에나 가방 내팽개치고 앉아서 게임부터 하려는 모습을 보면 나오던 눈물은 쏙 들어가고 대신 명치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고 저러다가 커서 뭐가 되려나 온갖 부정적인 경우의 수만 떠오른다. 실제로 몇몇 경우의 수는 아이에게 뱉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방법으로 초1부터 초6까지 계속 실패했다. 이제는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같은 방법을 반복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길 바라는 건 정신병 초기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고 했던가? 내가 한 때 청춘을 바쳤던 검도 경기에 비유해 보자.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시작’ 구호가 울려퍼진다. 마주 대치하던 두 선수 중 한 선수가 머리를 팡 치고 들어온다. 들어오기만 해봐라 벼르고 있던 상대는 재빨리 허리를 베었다. 머리를 친 선수가 점수를 잃었다. 2점을 먼저 잃으면 지는 경기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경기를 재개한다. 상대 선수가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는지 거리감은 어떤지 알아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기가 치고 싶은 머리를 쳐서 1점을 잃은 선수가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머리를 쳐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말하자면 아이 초1 때부터 초6이 된 지금까지 나는 틀린 시도만 냅다 반복한 검도선수 같은 엄마였다. 물론 똑같은 방법으로 공격해서 득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너무 낮고 이미 지나간 기회는 되돌릴 수 없다. 이제부터는 다르게 해야 한다. 어떻게 다르게 해야할지 아이가 중학교 들어가는 올 겨울 방학동안 열심히 알아보려 한다.


아이에게 엄마의 진심을 전하고 아이가 행동의 주체가 되도록 한 발 물러나서 엄마는 그저 옆에서 '난 널 믿어,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를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앞에 서서 ‘너 이 쪽으로 가야해, 아니면 큰일 나, 너 그러다가 넘어질걸? 넘어지면 밟힐걸? 밟히면 다시 못 일어날걸?’ 니가 넘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부정적인 예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에게 남들만큼 사교육을 퍼부어주고 24시간 케어해주는 엄마가 못 되니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아이의 평생을 지탱해 줄 좋은 습관 몇 가지만 몸에 익히고 독립할 수 있게 도와주자고 결심했었다. 아이에게 공부로 숨막히게 만들진 않았지만 바른 생활에 대한 높은 기준을 들이대며 아이의 자존감을 깎아먹고 있지는 않았는지 뒤늦게 반성하며 매일 들여다보는 곳에 써서 붙인다.


믿음은 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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