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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Sep 15. 2023

누구의 입에서든 마법을 부리는 단어, 미고사

https://brunch.co.kr/@swordni/73


이전 글을 읽으면서 우리 엄마는 그렇게 말 안하는데...

우리 셤니랑은 저런 대화가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는 분들 도 계실 것 같아서 쓰는 후속편이다.

나는 스스로를 돈은 좀 부족하지만 인정과 감사는 넉넉하게 주고 받고 있는 인생이라 평한다.

조금 거리를 두고 내 인생을 봤을 때 이 생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나보니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규율을 지키는 게 편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잘못한 건 인정하고 정면돌파하는 성향이었다.


시트콤 드라마를 싫어한다. 작은 실수를 감추려고 이말 저말 갖다 붙이고 사건이 점점 커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하나도 재미있지가 않아서다. 그래서 응답하라 1997의 성시원 캐릭터가 어찌나 속 시원한지 모른다. 꼭 나같았다.


응칠의 성시원을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같이 먹을 치킨을 주문하라는 미션을 받은 성시원.

깜빡 잊고 있다가 '왜 치킨이 아직 안오냐'는 식구들의 재촉에 실수를 기억해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 확 문을 열고 말한다.


'깜빡 잊고 주문을 못했다.'고.

TV에 그런 캐릭터가 나온 적이 없어서 나는 이때 성시원에게 반했다.



보통의 시트콤이었으면 어, 저기 배달이 밀려서 가지러 오래, 이러면서 집을 빠져나가 치킨집에서 하나 쎄벼오려고 하다가 들통나서 생 야단법석을 떨텐데 말이지.


엄마는 나와 통화를 할 때마다 '너는 어쩜 그리 꾸준히 000를 하냐고, 내 딸이지만 존경한다'고 말씀하신다.


'어린 시절을 돌아봐도 엄마한테 상처 받을만한 말을 들어본 게 없다'고 하면 엄마는 니가 잘해서 그렇다고 하시곤 했다.


그렇지만 나도 인생에서 군데군데 뻘짓을 했다. 그 일들은 부모님께도 얼마간의 부담이 되는 일이었음에도 단 한번도 '니가 그때 그걸 좀 더 잘 했으면'이라든가 '그러니까 내가 그건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든가 '니가 잘못해서 나만 이 뒷감당을 하고 있잖아'라든가 그런 류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나는 '어떤 말들은 하지 않음으로서 사람을 구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탈피중인 갑각류처럼 연약했던 20대의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나는 어디 구석에 숨어서 내상을 치유하느라 바빴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일을 한 게 간장이고 내가 부모였다면 아마, 나는 끝내 그 말을 삼키지 못하고 주르르 흘려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에게는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부모님이 계셨고,

결혼을 해보니 시부모님도 나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셨다.


아버님은 아들 앞에서도 '나는 며느리를 가장 믿는다'고 하실 정도.


돈 벌어오는 며느리, 생활비 주는 며느리니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받아서 쓰면서도 카드를 긁어대고 빚을 떠넘기고 그러면서도 당당한 사람들도 많다.


회사에서는 팀원들의 수고를 알아주는 팀장님 밑에서 일한다.

해내는 게 당연한 거고 못하면 갈구는 게 아니라 해내는 과정에서의 수고를 알아주고, 문제가 일어나면 같이 해결하면 된다고 하는 분.


나를 둘러싼 굵직굵직한 환경들 덕분에 나의 인정욕구는 언제나 찰랑찰랑 차있었다.


다만 나를 둘러싼 환경 중 남편과의 관계는 인정과 감사는커녕, 그가 하는 짓이 영 못마땅해서 찌푸리는 진실의 미간의 영역이었다. (잘생겨서 멋있어서 호인이어서 좋은 건 내 나이 앞자리가 3자일 때까지였던 것 같다.)


방시혁 의장도 그랬다. BTS의 성공 비결을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자기도 모르겠다고. 그걸 안다면 똑같이 트레이닝하면 똑같은 결과치가 나와야 되는 건데 자신없다고.


마찬가지로 내가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 회사 팀장님과 잘 지낸다고 해도, 그것이 인정하는 말, 감사하는 말을 주고 받아서 좋은 관계가 이루어진 것인지 이미 알 수 없는 다른 이유로 좋은 관계가 이루어진 후에야 그 좋은 말들이 나온 건지는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뭐가 먼저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럴수록 남편과도 잘 지낼 수 있어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인정하는 말, 감사하는 말이 가진 진짜 힘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이라고 편하게 아무 말이나 하던 나를 필터링했다. 한 템포 쉬고 잠시 입장을 바꿔놓은 다음에 대꾸했다. 생선을 손질할 때 비늘을 긁어내고 지느러미를 쳐내듯이 뾰족한 말들을 쳐내고 손질된 물고기 토막처럼 전달되어야 할 내용을 잘 보내는데 집중했다.(물론 남편 생각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네, 피곤했겠네, 잘했네, 그러자, 같은 동의의 표현들을 혀끝에 배치했다.


비난은 되도록 넣어두었다.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전달되도록 신경을 썼다.(물론 남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남편이 나의 가사 노동에 대해 '고맙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밥을 차려줘도, 커피를 내려 줘도, 과일을 깎아줘도 '고맙다, 잘 먹었다'를 꼭 한다. 그것만 해도 마음 속 울화가 많이 가라앉았다. 나도 그에게 의식적으로 고맙다고 말한다. 매일 청소기를 밀어줄 때, 커피를 타줄 때, 분리배출을 하고 났을 때 꼭꼭 잊지 않고 말한다. 


도깨비 중, 선인장처럼 클게요. 혼자서 잘 커 볼게요.


여전한 것도 많다. 나는 선인장처럼 손 안 가고 알아서 잘 지내는 사람을 원한다. 내가 그런 것처럼. 하지만 그는 손이 많이 간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적정수준의 노동량이나 빈도나 강도를 넘어서는 요구를 들으면 여전히 거절한다. 거절은 상큼하고 단순하게 해야한다. 미안한 척 해도 안 되고, 짜증을 내도 안 되고, 구구절절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남편과 혹은 아이와 혹은 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지금부터 만들어가야 하는 분이라면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자주 하고 들으시길 권한다.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등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안해)고(마워)사(랑해)는 마법의 단어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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