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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Sep 23. 2023

서른의 선택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들어가기

서른의 나는 무지했기에 용감했다.


박봉의 대리 주제에 서른에 인문계 전공의 석사과정을 시작한 그와 결혼했다. 검도장에서 만난 그가 칼이 바르다는 것이 결심의 이유였다. 서른의 시간만큼만 세상을 알았던 나는 운전이나 검도를 할 때처럼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에는 자기를 꾸밀 여유가 없어 본성이 드러난다고 믿었는데 그의 칼은 정직하고 바르고 묵직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생들이 또래들이 돈을 벌기 시작할 나이에 학업을 이어나가기 위해 어떻게든 자기 생활비를 벌어보려 동분서주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생활의 기반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걱정할 때에도 오히려 그를 변호하곤 했다. 영어 전공이라서 둘이 생활하는데 자기몫 정도 버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그가 일을 하고 내가 공부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게 내가 철썩같이 믿었던 근거였다. 


그는 내 기대와 달랐다. 석사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논문은 그렇게 다른 일을 해가며 생각을 스위치 켜고 끄듯 토막을 내어서는 쓸 수 없다고 했다. 일체 부업을 하지 않았다. 대학원 조교를 하면서 자기 학비와 용돈 정도를 벌면 자기 몫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 기대와 같았다. 칼을 정직하고 바르고 묵직하게 쓰는 것처럼 논문도 그렇게 썼다. 다른데 한눈 팔지 않고 좋은 논문을 써서 빨리 교수가 되는 것이 그의 가족 사랑법이었다. 그랬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번만 잘 넘기면 좋은 일이 있지않을까? 학수고대하며 버티던 나는 왜 가장인 그가 저토록 올곧게 공부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도 적령기가 있는데 일자리로 이어지는 문이 점점 닫혀가는게 보여서 나는 조바심이 났다. 


남편은 남편대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도 아무것도 불어나지 않는 공부라는 밑빠진 독에 계속 자기 인생을 들이부어야 하는지 그 독에 붓지 않으면 어디에 부어야 하는지 막막해졌다.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는 그에게 학생을 열심히 가르친다, 좋은 논문을 쓴다는 전혀 커리어가 되지도 돈으로 환산되지도 않았다. 대학은 그가 얼마나 실리기 힘든 학회지에 논문을 실어도 돈으로 보상해주지 않았고,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아무리 좋아도 4개월마다 그를 해고했다. 


수업이 없는 방학에는 월급이 없었다. 다음 학기에 다시 수업을 의뢰해줄지도 알 수 없었다. 10년을 넘게 한 대학에서 계속 가르쳤어도 그는 계속 해고되기 때문에 퇴직금을 받을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했다.

결혼 생활 18년차를 돌아보면 첫 5년 정도는 그가 대학원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해야 했으니 돈은 어쩔 수 없고 아이들 낳아 잘 키우면 된다고 낙관 속에서 버텼던 것 같다.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완성하기까지의 다음 5년 동안은 조금은 조바심이 났던 것 같다. 벌써 사십대가 되었는데 지금 교수가 되어도 결코 빠르지 않은데 왜 아무 곳에도 지원하지 않지? 왜 이 학교 저 학교 가득 채워 강의를 하지 않지? 40대 가장의 행보라기에는 내 기준 너무 소극적이고 고르는 게 많은 그를 보며 못마땅해했다.


“이렇게 해보면 어때? 저렇게 해보지 그래? 당신 지금도 커리어 시작하기에 이른 나이 아니야. 그렇게 이것 저것 재고 빼고 그러면 안 된다구. 여기도 넣어보고 저기도 넣어봐.” 그를 재촉하고 훈수를 뒀다.


그는 시들어갔고 잠을 못 잤고 우울증에 걸렸다. 공황장애 증상도 함께 왔다.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영상도 볼 수 없고, 잠도 잘 수 없는 그는 1분 1초가 고통스러울만치 느리게 간다고 괴로워했다.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나를 수시로 불러 다리를 두드려 달라,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00엄마, 00엄마, 00엄마, 그가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의 다리를 두드리면서, 그가 읽어달라는 책을 읽으면서 서른의 무모했던 내가 싫었다. 세상을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 오만했다고. 남들이 시댁 재산 따지고 남친 수입 따질 때 대범한 척 바른 칼, 큰 칼 운운하다가 이 고생을 한다고. 이런 걸 자업자득, 요즘 말로 스불재라 하나 싶었다. 


그대로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공황장애 때문에 사람 많은 곳에서는 숨쉬기가 힘들다는 그를 매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걸었다. 되도록 사람이 없을 시간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코스로.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니 탓이오, 보다는 내 탓이오를 많이 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걸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먹으면서 그도 조금씩 나아졌고 매일 걸으면서 우리 관계도 회복되었다.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올해 가을까지만 해보자. 대신 최선을 다해보자. 그래도 안 되면 미련없이 그만두자. 대리운전을 하든, 택배기사를 하든, 학원에서 가르치든 일을 하면 돈으로 환산되어 돌아오는, 파이프라인이 연결되어 있는 곳에다 인생이라는 물을 붓자. 남편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남편의 전공으로 넣어볼 수 있는 대학이란 대학은 다 지원했다. 아시아, 미국, 유럽. 그 중에 한국 대학은 없었다. 남편의 전공은 한국 대학에서는 뽑지 않기 때문이다. 있던 자리도 교수가 정년퇴임하면 AI와 협업할 수 있는 공대출신 교수가 들어왔다.


3월에 시작된 채용 절차는 수많은 줌 인터뷰를 거쳐 5월에 확정되었다. 2023년 5월 5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친정에 내려가던 중에 정식 채용 메일이 왔다. 결혼생활이 파탄날 위험에 처할 정도로 우직하고 정직하게 논문 쓰고 공부한 그의 방식이 마침내 통했던 것이다.


우리의 결혼생활을 그려보면 전속력으로 아래로 처박히던 비행기가 지면에 닿기 전 아슬아슬하게 기수를 돌려 날아오르는 모양새가 떠오른다.


남편은 혼자 체코로 날아갔다. 아직 그의 수입만으로 우리 네 식구가 생활하기 어렵고 나도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남편만 혼자 외국 생활을 하게 되었다.


유난히 가족과 부대끼며 생활하는 걸 좋아하고 혼자 있는 걸 힘들어하는 그인지라 아직은 낯선 그곳에서 기다려주는 가족도 없는 휑뎅그렁한 방으로 돌아가는 게 힘들다지만 이번에도 우직하고 정직하게 잘 해나가기를 바란다. 


서른 살의 무모했던 내 선택을 때론 멋도 모르고 감당했고 때론 후회했다. 바닥을 벅벅기며 존버하는 와중에 깨달은 것은 세상사에 정답은 없고 내가 한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드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어리석고도 과감했던 나의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온 나에게도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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