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내 모습을 향한 욕망의 파국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의무란 위대한 것을 느끼고 아름다운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지 온갖 사회 인습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굴욕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210p




쥘 드 고티에가 명명한 <보바리즘>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환상이 자아내는 병이다. 이 환상은 끝없는 불만을 유발한다. 이런 성격을 가진 인물은 이상의 안경을 쓰고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현실을 변형시킨다. -531p, 작품 해설


플로베르는 엠마의 성격적 본질인 <보바리즘>을 통해서 19세기 초반을 물들였던 낭만주의를,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 잔존하는 낭만주의적 기질을 유감없이 해부하여 보여줄 수 있었다. -533p, 작품 해설




세계문학에 대한 거창한 마스터플랜조차 없던 시절에 소심하게 수집했다가, 15년치의 책을 대규모로 정리했던 그 해에도 차마 처분하지 못했던 책을, 그래도 읽어보고 싶어서 남겨둔 한편 허술한 관리상태로 보낼 곳이 없어서 소장하고 있던 덕분에 고전에 대한 욕구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책소개책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현대소설의 시조새였다. 보들레르와 서로 자동소환하는 건 덤. 엠마 보바리의 등장부터 흥미진진한 그녀의 인생보다 더 재미있는 건 플로베르가 그녀를 창조해내면서(사실 실존인물이 영감을 주었다고는 하나) 겪어야만 했던 창작의 고통이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뻔한 권태와 방황, 심지어 그 결말까지도 한땀한땀 세밀하게 엮어내고 마치 거장의 드레스처럼 봉제선 하나 남기지 않은 어느 무명작가(였던 이)의 걸작은 세기를 초월하여 하나의 현상이 되어있었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돈키호테>라는 인물의 망상은 Quixotism 키호티즘이라는 어떤 특정한 기질과 상황(트라우마)의 조합으로 다가오는 한편, 엠마 보바리의 망상은 Bovarism 보바리즘이라는 흔한 현대인(재벌집 며느리에게 감정이입하는 구멍가게 알바생)의 정신상태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엠마 보바리는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 매달려있거나, 노력없이 막연히 미래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입을 하기에는 마음이 상하지만 타자로 분리시켜 내기에도 마음이 불편하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지만 적어도 십년전까지는 종교에 가까운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싶었고, 현실에 부재하는 그 사랑을 로맨스가 듬뿍 들어간 드라마에서 찾으려 했다.


그 믿음은 갈수록 더 큰 배신을 경험하고 로맨스를 향하던 덕심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범죄(+응징)스릴러에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로맨스를 버리진 않았다. 사랑만큼은 영원보다 순간이 아름답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It's always you.'와 같은 구절(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눈물을 흘린다.


영어로 읽으면 정신연령이 더 낮아져서 더 몰입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때도 있다. 이 부분을 오해하는 듯한 외국인의 글(=이 글을 공유한 글!)도 있는데, 나의 의도는 내 영어실력이 고딩 수준이라 뇌가 더 순수한 상태로 읽는다, 뭐 그런건데. 영어를 디스(?)했다고 읽었나 봄. Whatever.


소문으로 접했던 <마담 보바리>의 이미지는 웰메이드 막장드라마의 고전다운 화려한 문체로 예상되었으나 역시 걸작은 직접 봐야한다. 책소개책을 수집하는 한편 어디까지나 그것을 참고하여 진짜 고전을 수집하는 것이 책수집의 최종목적이다. 줄거리는 작품을 대체할 수 없고 뒷말이 많은 책일수록 원작을 읽어봐야 모두에게 공정한 리액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 -132p


그러나 땔감이 저절로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땔감을 너무 많이 쌓아올린 탓일까, 불길은 그만 사그라져 버렸다. 사랑은 부재로 인하여 조금씩 꺼져 갔고 미련은 습관 속에서 질식해 버렸다. 그녀의 창백한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불길의 남은 빛은 더욱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점점 사라져갔다. -182p


이윽고 마음이 가라앉자 엠마는 자기가 그를 터무니없이 비방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방하다 보면 우리는 늘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우상에는 손을 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칠해 놓은 금박이 손에 묻어나는 것이다. -408p




불타버린 욕망 이후에도 살아남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고 쓸 수 있는 배경에 엠마와 플로베르가 파낸 자국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드가처럼 무기력한 여성들을 그려내거나 보들레르처럼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존재를 그려낸 남자들이 있어서 오늘의 여성은 무기력을 딛고 산책하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