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장 코끼리와 여성서사의 위로
새로운 여정을 떠나기 전에 내가 어쩌다 코끼리가 되었는지 (법적으로 호모 사피엔스?겠지만,) 이야기 해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코끼리인 이유를 알지만, 내게 코끼리를 배정한 이 우주의 심오한 속내는 모른다. 코끼리는 '캐러나비'란 일본식 사주 캐릭터에 생년월일을 입력해서 나온 동물이다.
돼지띠라고 돼지라는 별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소속명으로 쓰여 우리끼리는 '얘도 돼지야', '너도 돼지야?' 이런 대화가 일상이다.) 코끼리 캐러나비는 코끼리라고 불러도 되겠지, 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16년 전에 지은 별명은 큰 실수인 동시에 행운이었다. (그 시절 덕후들만 알던 MBTI와 다르게, 캐러나비는 유행에서 멀어졌으니, 아무도 모름)
코끼리는 행운의 상징인데, 내 주변에는 항상 여행자들의 선물로 받은 전 세계의 코끼리 오브제가 넘쳐난다. 심지어 MBTI를 동물화한 그림에 높은 확률로 ENTP인 내가, 아니 상징적 존재로인 엔팁이, 코끼리로 표현된 적도 있다.
상징적 존재로서의 코끼리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내 사주의 좌표가 '우두머리 코끼리'라는 것 외에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당시에는 주변에 다른 코끼리가 없었고, 말했다시피 이 분류법은 유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고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내 이름으로 남아 오랜시간 내 행운과 자신감을 지켜주었다. 한편 코끼리라는 생명체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캐러나비 사이트에 의하면 코끼리는 평생 성장하는 동물이라 했다. (지금도 잘 찾아보면 본인의 캐러나비를 알아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동물병원에서 일하던 친구는 코끼리의 식비가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가끔 인류학 관련 자료에 의하면 코끼리는 모계 사회를 이룬다고 했다. (나도 그러고 있는거면 좋겠다. 한국에서 Alpha Female로 살아가려면 세포 하나하나까지 Normal People과 충돌해야 하고 그 얘기만 떠들어도 네버엔딩이다. 일단 넘어가겠다.) 모계사회의 '우두머리' 코끼리라니, 내 마음엔 들지만 남들에게 안 들키는(?) 연습도 해야겠군, 이라는 생각을 그 당시, 스물 다섯에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성 알파들과 사극 뺨치는 수준의 (뭬야?) 경쟁을 본의 아니게 해야할 운명인 것도 이미 그 태풍에 휘말리고 나서야 알았다.
실제로는 오랜 기간 사극의 위로를 받았다. 특히 한국에서 걸크러시가 유행했을 무렵인 2009년에 새롭게 등장한 <선덕여왕> 이후로 규방을 벗어난 왕실 여성들의 활약은 내 영혼의 양식이었다.
내 코끼리의 영양제였다.
좋아하는 배우, 한효주가 연기한 최숙빈이 타이틀 롤이었던 <동이>를 보면서 조선의 후궁 품계와 왕후 계보를 따로 연구했을 정도로 매우 심취했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국모라 불리던 여성들도 왕후로 봉해지기 전의 본명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왕실 밖에서 족보를 구성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남자는 이름, 여자는 성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 관점에서 외국 여성들이 결혼하면서 성을 바꾸는 것이 굴욕적으로 느껴지는데, 팩트는 한국사에 그나마 기록된 여성들의 상당수가 그저 '아버지의 성'으로만 불려졌던 일도 매우 흔했다. 그 와중에 숙빈 최씨(동이)가 두 번 출산하는 과정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잉태한 시점에 근데 과학이 도입되기도 했겠지만, 왕실 생활을 간섭할 외척이 없다는 것도 한 몫 했을 것 같다.
문학에는 드라마 <선덕여왕> 이전에 <미실>과 <화랑세기>가 있었다. 아직도 <화랑세기>까지는 찾아보지 못했지만 (역사덕후 아님주의)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미실>은 반복해서 읽었다.
이건 거의 판도라의 상자 수준의 폭로인데 (천문학적 관찰, 기록의 정확성이 다른 역사책들보다 우수한 작품이 <화랑세기>이며, 핵심 인물을 중심으로 잊혀진 이 고대사를 복원한 작품이 <미실>이다.) 그 승자의 역사를 뒤엎지는 못했다. 이 부분을 드라마가 교묘하게 비틀었다.
드라마 타이틀 롤은 이요원 배우가 연기한 선덕여왕(덕만공주), 그러나 진주인공인 '미실'을 미워할 수 없는 악역으로 만들고 (선덕여왕이 물리쳐야 할 최후의 드래곤, 또는 대장 몬스터의 역할) 마야부인이 '너의 존재는 한줄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문으로 봉인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허구의 비중이 커진 드라마에서는 그냥 미실을 완전히 허구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는 이상, 왕실에 의해 그녀와 관련된 기록이 말살된 것으로 추정해보거나 의심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민간 여성을 주인공으로 여성의 한국사를 재정비한 2010년대 사극도 보긴 했지만, 검소한 조선인의 패션과 리빙 아이템은 가끔 너무 지루했다. 그 중에 남성이 패셔니스타였던 <성균관 스캔들> 처럼 보기 좋은 것(eye candy)도 있었지만 맥락이 달랐다. <성스>의 컨셉과 여주인공도 훌륭했으나 여성중심 서사로 보기엔 남장여자 판타지물에 가까웠고, 오히려 이 작품은 퀴어한 암시를 대중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연기대상에서 송중기와 유아인이 베스트 커플상을 받아서 이슈가 됐었는데, 이 현상은 여성 팬들의 팬픽처럼 형성된 케미스트리가 본작에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무렵에 손대기 시작한 다른 영양제는, 바로 내 덕질의 코어인 추리소설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이 결국 나를 북유럽 스릴러 소설로 이끌었고 인생책이 될 작품들의 저자인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를 만나게 했다. (책사냥은 오래된 즐거움이었고 특히 이 무렵엔 외국소설 매대를 알파벳 순으로 터는 게 취미였다.)
약 10년 후인 2020년에 '스웨덴어는 30년은 안 걸리겠지.'라는 코멘트와 함께 밀레니엄 1권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영어판을 읽으면서, 영어 눈트임 인증을 했던 그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을 만난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