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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사자도 있다던데요?

영어책 수집가라면 펭귄, 펭귄 옆에 사자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아, 이제 원서를 읽을 수 있으니까 원서를 좀 쟁여봐야겠어. 때는 2020년, 12년 동안 벼르던 유럽여행이 또 날아갔다. 새로운 여행 준비를 잠시 미루고 두 번의 미국 한달살기 이후 잔뜩 영감을 받은 영어공부에 박차를 가했지.


어느 날 마법처럼 영어책이 읽히기 시작했다.


원래 나는 책덕후이긴 해도 책을 빨리 읽지 못해서 외국어도 대부분 입말의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대로는 어른들의 세계를 욕으로 배울 것 같았다. 첫 미국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후, 2017년 1월에는 수능 단어장의 예문 1000개를 필사했다.



짐바브웨에서도 영어 말고 달리 더 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


이어서 텝스, SAT, GRE 단어장을 단계적으로 털고 있었다. 전공 이외의 단어를 따로 '암기'한 적이 없어서 수능까지 거슬러 올라가긴 했지만, 사전이 있으면 번역도 할 수 있었다. 어휘력이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내 영어의 코어는 단어장이 아니다.


유럽여행 가이드북과 함께 12년을 묵힌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원서가 있었다. 문제풀이용 '독해'가 아닌 텍스트 자체를 즐기는 '리딩'을 하기 위해 이 책만큼은 모든 단어와 문장 표현을 소화하겠다고 다짐했다. 단어장 예문과 대학영어 교재의 본문을 필사하면서 <인간관계론>을 반복해서 정독했다.


그로부터 3년 정도 <인간관계론>과 영어 단어장, 수업용 영어 논문을 제외한 다른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 사이에 일본, 말레이시아, 짐바브웨도 가고 미국도 한번 더 갔다. 느리게 읽지만 내게 없는 멋진 책을 보면 눈이 커지고 만 12세 이후로 뭐든 읽을 수 있었던 책덕후이기 때문에 다른 재미있는 한국어 책을 읽다보면 영어는 뒷전이 된다.



남아프리카에서 지니에게 입양된 쌍둥이 펭귄


책알못, 영알못이 3년만에 2000페이지 분량의 스릴러 소설을 그냥 읽게 된 기적은 아니다. 비록 그 책을 한글판으로 네 번 이상 읽었다 해도.


영어 눈트임의 순간을 함께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즘 영어판 1권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는 동안 2권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를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원서를 수집했다. 원서를 탐색하다보니 펭귄 북스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올해 새로 나온 알라딘 리포트에 의하면 나, 펭귄 북스 좋아하네.


카네기만 읽던 시절, 2018년 아프리카에서 쌍둥이 펭귄을 만난 건 운명인가. 지니의 펭귄이들과 함께한 여행은 그 시점까지의 '함께하는' 여행과는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이 있었다. 외향과 내향으로 성향을 분류하자면 people person이고 개와 고양이로 취향을 분류하자면 cat people이지만, 반려인이나 반려고양이를 모실 생각은 없었고 '혼자하는' 여행이 좋았다.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모시기에는 나를 모시기도 벅찼다. 나름 모시는 자의 즐거움(?)도 알고 자아도취형 우두머리 코끼리이자 알파걸이었던 20대와는 달랐지만 그래서였을까? 팀플이 가끔 힘들었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무수한 팀플의 조합이고 팀플을 잘 하려면 매번은 아니더라도 묻어갈 수 있는 것이 미덕인데, 매번은 아니더라도 묻어가는 것이 리드하는 것보다 더 힘들 때가 있었다. 아니, 많았다.



빅토리아 폴스에서 자연 샤워하는 한국언니


함께하는 여행은 달달하지만 종종 피곤해질 때가 있다. 너무 달아서 물리는 디저트라던지, 매콤함을 보조하는 단맛이 아닌 매콤함까지 싫어지는 단맛을 지닌 떡볶이처럼. 단맛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물론 단맛의 요소를 내가 고를 수 없는 대형마트 스타일의 패키지를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듬초밥은 남김없이 먹는다. 초밥은 달지 않고, 다 좋아하기 때문에 선택하기가 더 어렵다. 여행의 추억은 아름답고, 여행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운 사람들이 많은 것과 별개로 모든 순간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혼자하는 여행에서도 자발적으로 대화를 나눈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짧은 시간동안 버스 대기줄에서 가장 친했던 미국 언니가 12시간을 가야하는 버스 짝꿍이었는데 이 사건이 행복하기는 커녕,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영어 말다툼으로 남을 줄이야. 혼자 여행이 그리워질 무렵, 혼자 여행을 빛나게 해줄 아이템이자 모시지 않아도 되는 반려고양이(?)를 만나게 될 운명을 암시한 아이들이 바로 이 쌍둥이 펭귄이다.


아직 펭귄 북스에 입덕하기 전인데도, 남아프리카에서 온 펭귄 아기들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빅토리아 폴스(짐바브웨와 잠비아 국경에 있는 빅토리아 폭포의 영문명이자 근처에 있는 도시, 그리고 공항의 이름이다.)와 짐바브웨를 떠나는 날, 공항 기념품 판매점에서 내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빅토리아 폴스 공항의 게이트에서, 짐바와 함께


펭귄이들과 함께 승선한 보트로 다녀온 잠베지 강 주변에서도, 국경을 넘어 사파리용 자동차를 타고 다녀온 초베 국립공원에서도 끝내 만나지 못했던 아프리카 '사자'의 아기. 코끼리 가족은 사파리에 갈 때마다 만났었고(그것도 아주, 아주 많이) 돌아올 집에도 사방에 코끼리 오브제가 있으니 달리 미련이 없었고 사자가 그렇게 보고 싶었다.


어쩐지 나는 햄릿보다 심바가 그렇게 좋더라고.


다시 2020년, 펭귄 원서를 맹렬하게 수집했을 때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미 내용을 꿰고 있는 밀레니엄을 읽으면서 새로 도전했던 책이 <사피엔스> 영어판이었고 그 해 연말까지 스티그 라르손과 유발 하라리의 3부작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 마지막 책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 의하면 <라이온킹>의 원작은 아프리카 배경이 아니라고 한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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