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여름과 루비>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80p, 아이들은 현실을 수정한다
옷깃만 스쳐도 염료가 묻어날 것 같은 미색 표지에 담긴 섬세한 문장을 아껴 읽느라 좋은 곳에만 데리고 다녔는데 비가 세차게 왔다. 사연이 복잡한 방수가방을 생략하고 코팅되지 않은 에코백에 코팅되지 않은 책이 물과 마찰력으로 닳아서 꼭지점마다 심지로 들어간 하드보드지가 보였다.
책의 손상은 마음이 아팠지만 덕분에 이 책은 욕실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얼굴이 녹아내려도 괜찮은 곳에서 실컷 녹아내리고 녹아내린 마음까지 함께 씻어냈다. 통편집할 각오로 써나갔던 (별로 알리고 싶지는 않았던) 옛날 이야기는 낡은 휴대폰이 알아서 삭제해줬다. 아침부터 감성폭발했던 아침을 다시 밤으로 만들어버리고 다시 시작한 아침에 마음을 다잡고 쓴 리뷰는 저장 후 다시 나타난 빈 종이(?)를 다시 저장하는 (안 하던) 짓으로 또 사라졌다.
괜찮아. 어차피 마음에 들지 않았어.
속은 쓰리지만, 이건 어쩌면 인용문 뒤에 숨지 말라는 계시일지도 모르겠다. 기록하고 싶은 문장은 너무도 많지만, 압축된 (구구절절하지 않은) 책소개로 골라둔 문장을 세 번이나 필사하려면 적어도 독서대는 있어야하니까. 리뷰를 저녁으로 미루자니 오기가 생겨버렸으니까.
기술적인 오류가 아니더라도 책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책이다. <여름과 루비>가 들추어 낸 상흔을 들여다보느라 한 달 내내 수많은 원망과 원한 속에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완독 전에 뭐라도 완성을 했다면 좀더 자랑할 수 있었을텐데, 읽는 속도와 쓰는 속도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자고 있었어야 했던) 시간에 완독을 하고 감성이 넘쳐서 뭐라도 써보려다 실패했다. 어떤 원고는 비공개라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편이 좋은데, 딱 그런 경우다.
'루비'를 향한 '여름'의 끌림과 부러움과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내가 루비를 배신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단 한순간도 비겁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멍청하거나 기억력이 나쁜 것이다. 이 둘은 같지 않다. 나는 기억력이 나쁘지만 멍청하지 않다. 나는 내가 비겁했던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오래된 기억은 날짜가 소실됐다.) 그 중 몇개는 장소가 피아노 학원이었다. 자랑할 수 없는, 수치에 가까운 기억들.
나는 한 사건의 가해자였고, 다른 사건의 방관자였다. 특히 두번째 사건은 최악의 방관자였다.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것마저도 죄가 되는 그런 종류의. 그 죄를 사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다시 태어나서 기꺼이 그 모든 악독한 순간을 똑같이 경험할지라도 그 사건을 바꾸고 싶었다. 그와 비슷했던 다른 사건들도.
어떤 식으로든 내가 피해를 입는 경우도 당연히 마음에 사무친다. 어떤 식으로든 가까운 사람이 방관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그 가까운 방관자인 경우는 같은 구간을 무한히 반복해서라도 그 장면을 수정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고 싶다. 마치 도돌이표처럼. 지금 이 글을 세번째 쓰는 것처럼. 내내 고생했던 삼십년을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바꾸고 싶다. 다른 지독한 순간을 다시 겪어야 한다 해도.
나는 나의 루비와 이별하지 못한다.
내가 루비에게 비겁했던 순간을 잊지도 못하고, 고백하지도 못한다. (고백하는 건 최악이다.) 그 애가 루비였다는 것조차 아무도 몰라야 한다. 그런 죄책감을 품고 건강한 삶을 살겠다는 건 과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억하지 못하거나 멍청한 사람들이 훨씬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사는 것을 권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인생, 인간의 생이라는 왕관의 무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