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의 소설을 읽을수록, 그리고 소설에 대해 말할수록 지울 수 없던 생각은 인물들이 꼭 다른 이름을 한 나의 얼굴이며, 나의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얼굴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337p, 해설(소유정)
본인이 '아직도 젊은 작가라니'라고 놀라셨다(?)는 장강명 작가와 <82년생 김지영>의 저자 조남주 작가는 70년대생이다. 넓디넓은 그놈의 MZ보다 선배다. 최근에 알게된 기묘한 분류법(?)에 의하면 '82년생'은 X세대라고 한다. 일면 납득이 되면서도(그렇다. 나는 '납득'해야하는* 천상 MZ다.) 의아하다. 고작 4개월 차이로 X세대가 되지 못해서 82년생보다는 99년생이 친근한 걸가? 그건 당연히 아니다.
<젊은 근희의 행진>을 온라인 장바구니에 챙겨놓았는데 마침 그 무렵 도서전에서 다시 만났다. 최애부스가 되어버린 은행나무에서 족히 한 시간은 머물렀을 것이다. 고전은 굳이 이 책이 아니어도 돼, 앤솔로지는 아는 작가가 좀더 많았으면 좋겠어, 이런 식으로 구매충동을 다스리다 결국 이 책을 데려왔다.
인친(과 브친)들은 아시겠지만 신간, 화제작, 베셀, 국내 작가를 충동 구매하지 않는데 이 책만큼은 거절하기 힘든 끌림을 느꼈다. 저자도, 내용도 전혀 몰랐다. 그냥 끌렸다.
내 일기장 보는 듯한 낯뜨거움에 더해 차마 글로도 옮기지 못했던 그 시절(주로 30대 중반)의 처참함을 어느 정도 치유 과정에 있는(?) 사람의 담담한 서술을 통해 직면하느라 정신없이 읽었다. 이렇게 초반홀릭하는 작가의 책을 읽을때는 작가의 말을 살짝 엿보게 된다. 그녀의 블랙홀....검색...왜 이렇게 '똑같은 지' 완전 납득이 되는 그녀의 출생연도. 심지어 같은 연도에 태어난 같은(?) 외계인이다.
'책스타그래머'라면 <젊은 근희의 행진>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표제작 포함 2022년의 작품을 먼저 읽으면 좋다. 인용문을 통해 한국판 <노마드랜드>를 엿보고 호기심을 가져주시길. 내가 아는 내 또래의 작가와 예술가들 대부분에게 익숙한 '그 지역'의 시세를 알게되는 것은 덤이다. 시대의 초상을 활자로 그려내는 그녀의 재능을 부러워할 새도 없이 그냥 빨려들어간다. 이 책은 고딕이 아니지만 고딕이기도 하다. (강화길 작가가 추천사를 썼다.)
*편집왕님의 최근 글들 참고
냄새의 침입이 공간의 섞임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더럽고 치사한 종류의 범죄처럼 느껴졌다.
침해하지 말라고. 이게 어렵나?
각자 그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이게 어렵나?
-28p, 미조의 시대
젊은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살림집이 아닌 거지. 다양한 옵션은 기본이고, 도배와 장판은 필수고. 집주인 마음은 생각도 안 해.
근데 너 왜 자꾸 젊은 사람들이라고 말해? 우리도 젊잖아.
......그러게. 일할 떈 내가 젊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나도 가난하면서 왜 집주인 마음으로 손님을 보게 되는지 모르겠어.
-63p, 엉킨 소매
도대체 우리는 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돈이 없나. 꿈과 돈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언니도 알았다. 꿈을 제대로 이루거나 완전히 버려야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98p,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나는 오근희의 순진함을 비웃었다. 벗방씩이나 해놓고 고작 1억? 나는 그걸로 너의 인생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그걸론 연남동 반지층 집도 못 사. 그걸론 네가 좋아하는 신축 풀옵션 빌라 전세금도 못 내. 나는 그런 말들을 떠올리다가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계속 그런 식으로 살 거면 나, 너랑 절연할 거야.
오근희는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더니 한참 뒤에 대꾸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절연해.
그게 우리의 세 달 전 마지막 통화였다.
-140p, 젊은 근희의 행진
어딘가에서 20세기의 전쟁이 반복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21세기에 져서 꿈을 버린다. 둘 중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일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믿기 힘든 두 가지 일이 우리의 발밑에서 충돌했다.
-193p, 연희동의 밤
오픈한 뒤로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손만 쳐다봐요. 저렇게 다른 가게 음료를 들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내 얼굴을 밟고 지나간 것 같아요.
-261p, 그는 매미를 먹었다
서울에선 무슨 일을 하든 치열했고, 매번 많은 사람들이 경쟁에서 도태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항상 나도 있었다. -279p, 현서의 그림자
내가 속하고 싶은 범주가 없다면 새로운 범주를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동안 외계인이 된 기분이 든 적도 많았다. -340p, 작가의 말
복권이든 공모전이든 상금을 받으면 나도 좋아하는 신축 풀옵션 빌라를 떠올리기보다 어차피 내년에 가려고 계획중인 세계일주를 더 빨리, 더 오래 갈 수 있다는 생각뿐인 나 자신이 한편으로는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