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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Jul 31. 2023

'그런 여자' 되지 않기? 그런데 '그러면' 좀 어때.

강화길 <화이트 호스>

여성에게 입사는 '그런 여자'로 명명되지 않기 위한 분투이자, '그런 여자'로 명명된 이들을 외면하라는 명령에 따르는 일이다. -260p, 해설(신샛별)




소문과 험담에 갇히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지만 대개는 사냥 당하는 '마녀' 역할과 자신이 '마녀'가 아님을 인증함으로써 은근 사냥을 조장하는 '가십걸' 역할은 여성이 맡는 경우가 많다. 남녀가 유난히 유별한 프랑스어는 어떤지 몰라도, 기본형이 대체로 '남성형'인 영어조차 '마녀'를 뜻하는 단어는 witch가 기본형이다. 남자 마녀(응?) 그러니까, 마녀에 대응하는 마법사는 warlock 또는 (정말로) male witch인데, 아무래도 이 패키지는 다소 불길한 예감이 없지 않다. 그러니까, '마녀'처럼 비하의 의미가 담기지 않으려면 wizard를 쓸 것이고 이 단어는 남성이 독점했으며, 그 조차도 그렇게 긍정적인 어감은 아니다. 친숙하지 않지만 은근 빈출단어인 socerer는 같은 어원의 soceress라는 여성형이 따로 있다. 이 단어들은 모두 '흑마술'을 구사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단순한 magician과는 다른,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 중심에 witch가 있다.  


문제는 마녀가 아니다. 가십걸이다. 왜 여성들은 같은 여성에게 흠집을 내려고 안달을 하는가? 왜, 동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왜, 나는 고고하다고 말하는가. 일단 여성 내부에서 서열이나 흑백을 논하는 여성들은 경계하고 봐야 한다. 왜 그녀들은 그토록 서열에 목숨을 거는가. 내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왜 그러고들 사냐고 따지는 것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평생을, 죽을 때까지. 많은 여성들이 등골 빼 먹는 남편이나 아들놈보다, 자기보다 팔자 좋은 여성의 험담을 하느라 에너지를 쏟는다. 대체 왜.


이들에게 품격과 재력을 갖춘 결혼상대 또는 불륜상대(주로 남성)나 몇 안되는 좋은 일자리나 재물은 그야할로 '한정된' 자원이다. 이 자원을 다수의 불특정 여성과 피튀기에 싸워서 얻어내야 자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이라고 평생 세뇌당한 것도 모자라서 셀프 세뇌를 하고, 딸들을 세뇌한다. 그야말로 세뇌의 재생산이다. 대체 왜.


왜 가부장이나 예비 가부장보다도 자기들이 열심히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거지? 요새는 열녀문도 안 세워주는데. 자기 작품 없이 현모양처로 성공한다고 해서, 5백년 뒤에 십만원권 지폐에 초상화가 새겨질 리도 없잖아. 그런데 대체 왜.


다시 강조하지만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남편이나 아들, 혹은 이웃집 남자가 명예나 재산을 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곧 자신의 것이고, 자신이 그 소유자를 통제하지 못할때만 화를 낸다. 그런데 이웃집 여자, 엄마 친구 딸, 사돈의 팔촌이나 예쁜 친구, 심지어 자기 가족 중에서도 여성 구성원이 (남성의 도움 없이) 가진 것은 배가 아프다. 여성이 무언가 남들이 탐낼만한 것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여성은 마녀가 된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 탐낼만한 것을 못가진 이유는 같은 세대의 남자형제나 남자사람친구들에게 먼저 기회가 갔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넘사벽인 일류 여성들이 정당하게, 사실은 정당한 이상으로 노력해서 성취한 것들을 같은 여성들이 흠집낸다. 자신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울 자신이 없기에, 기울기를 보정해야 한다는 생각 이전에, 중력을 거스르는 여성들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이다.




가십의 민족 사피엔스는 원래 가십을 좋아했다. 가십으로 결속력을 다졌기 때문에, 결속을 갖춘 인간 사회의 최대 범위는 가십이 미치는 범위인 150명 내외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 누구와 잤대, 라는 기본적인 가십은 일부일처제나 가부장제가 기본값인 사회에서 결국 '그런 여자'를 골라서 '마녀'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이다. 가십 자체는 마치 여드름처럼 우리가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나, 여성에게 필요 이상의 도덕성을 요구하고 남성의 부도덕(아니, 바람은 혼자 피냐?)까지 홀로 떠맡아야 하는 사회에서의 가십은 출처가 불확실한 '집단 언어폭력'이다.


특히 집단은 어느 동네 어느 무리 등으로 뻔해도 개개인이 묻어갈 수 있는, 이런 류의 집단 폭력과 익명성이 시너지를 일으킬 때, 특히 신나는 개인이 있을 것이다. 온라인은 몰라도 오프라인에서 이와 같은 출처 불확실한 소문을 전파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녀'가 가진 능력을 시샘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굳이 선을 긋고 싶지 않지만, 종종 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말 안해도 알아채야 하는 선을 안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덕분에 매너 없는 사람과 차별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그러니까, 어미와 존칭을 떠나서 말 습관이 더러운 사람들, 폭력적이거나 시비조인 사람들, 사람을 집단 단위로 분류하기 좋아하거나 '나'와 나머지 (아둔한) 너희들로 나누어 사고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감없이 선을 그어야 한다. 그 선을 안 그으면 멀쩡한 내 이웃이 피해를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별 것 아닌 이유로 여성을 험담하는 남성과 여성을 험담하는 여성 또한 선 밖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나조차도 쉽게 여성을 '이유없이' 미워하지만, 항상 남성을 미워할 때는 그 '명분'이 필요했다.


이십년 , 어떤 여자 선배가  '남성' 연예인이 싫은 이유가 '마초'이기 때문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마초' 아니어도 '그냥' 싫었는데, 그녀의 뉘앙스는 '마초' 것보다  정당한 '명분' 있어야만   같았다. 그런 뉘앙스가 니었는 그녀의 질문하는 습관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가 제발 저려서 (왜냐면 실제로는 '그냥' 싫었으니까.)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초인 것으로도 충분하고, 마초가 아니래 충분히 싫어할  있다. 무엇보다 그건 나의 공식입장이 아니었다. 그냥 개인적인 필로우 토크였다. 여담이지만  연예인은 군대 문제로 '남성' 집단에서 거의 매장됐다.           

   

이유없이 미움을 받는 여성들은 많다. 단지 비호감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예계 생활이 고달프거나, 그녀를 물어뜯기 좋아하는 대중들의 먹잇감으로  쓸데없는 기사에 실려 내던져지는 여성들. 소설집의 정중앙에서 시작하는 <오물자의 출현> 바로 그런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성에 갇힌 , '죽음마저도 이야기에 강제로 헌납해야만 하는' 김미진은 그야말로 '뭣도 아닌데' 셀럽이다.


보통의 여성들이 물어뜯기  좋은 타깃이다. 배우이자 예능인이되 딱히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했다. 우리가 유명한  자체를 얼마나 차별적으로 적용하는지 한번  검토하게 된다. 김미진의 대립항에 들어있는 이진오는 성실하고, 훤칠하고, 투명(?)했다. 그의 TMI 내가 봐도 노잼 오브 노잼인데, 그게 노잼이라서  남자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김미진은 미움을 샀다.


오, 이게 실화였다면! 거기서부터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가십' 그 자체는 싫다.) 하지만 이야기가 산으로 갈수록 '뭔가 의도가 있겠지'라는 독자발 희망을 계속 주입해야 결말에 도달할 수 있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경우, 책 친구의 추천에 따라 연도별로 작품을 재배치하고, 해설에 등장하는 순서와 최대한 비슷하게 읽어서 마침내 재미를 찾았다.




목차 순서로 가장 처음에 오는 <음복>은 (작중 후기작이라) 결과적으로 두 번 읽게 됐는데, 두 번 읽어도 이 책은 인트로가 안티였다. 나머지는 적어도, 전개의 스릴과 절정의 안타까움, 열린 결말이 주는 여운 또는 안도가 있었다. 적어도 최악은 면한 느낌들. 애초에 최선은 없었지만 '내'가 차선이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나'야말로 악의 축일지도? 라고 되묻는 이야기는 응원하고 싶다. 그런 자기 발견이라면.


해설은 정중앙인 <오물자의 출현>까지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다. 해설만으로 단편 분량을 차지하면 읽지 않고 넘어가기도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고딕' 양식으로 언어의 성(마인드 팰리스?), 소문의 벽을 머릿속에 형상화하는데 해설의 역할이 컸다. 작중 후기작인 <음복>과 <가원>의 해설은 본문의 아리송함을 풀이하기 보다는 그 자체로 새로운 아리송함이 되었다. '다시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다짐에 작은 위로를 얻는다. 그래, 본문 안에서 잘 드러내 보자고.         




다시는 리뷰를 이렇게 길게 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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