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놀이

단편소설 <구슬>

우리는 빛이 들지 않는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니트 원피스에 쫄바지를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나는 어디서든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혜지는 발레의상처럼 나폴나폴한 원피스를 입고 벌 받는 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가, 그만 양다리를 나란히 내 엉덩이 뒤로 뻗었다. 혜지의 엄마는 아침마다 혜지의 머리를 높이 묶어주셨다. 하지만 혜지의 치맛자락만 보면 투우장의 황소처럼 뛰어다니는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 때문에, 하교할 무렵 혜지의 포니테일은 한참 아래쪽에서 시작한다. 파마를 하고, 반묶음을 한 내 머리는 일부러 풀지 않는 이상 원위치를 벗어난 적이 없다.


"수성아, 뭐해? 인형 옷 안 입힐거야?"


혜지를 꼭 닮은 혜지의 인형을 보느라, 내 인형은 헐벗고 있었다. 아직 내 손으로 바느질하기 전이라 내 인형이 가진 옷은 분홍색 코트와 (그리 화려하지 않은) 웨딩드레스 뿐이었다. 혜지의 인형이 입고 있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단순한 디자인의 코트를 입혔다. 웨딩드레스는 왜 흰색일까, 생각하면서.


"너희들, 제자리에 앉도록 해."


도영은 인형들을 위한 책상의 반대쪽에 자기의 인형을 세웠다. 도영의 인형은 검은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인형을 어떻게 꾸밀지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혜지와 다르게, 도영은 인형들의 대사에 공들였다. 오늘의 배경은 대학교였다.


"너는 왜 앉지 않아?"

"너라니, 난 교수님이야. 교수님이라고 해야지."

"교수님은 몇 살인데 벌써 교수님이세요?"

"난 조기졸업하고 열여섯살에 대학교에 입학했어."


인형극은 그런식으로 흘러갔다.




미국에서 혜지와 재회했다. 산타페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날, 라과디아 공항에서 자꾸 쳐다보는 한국인 아줌마에게 할말 있으시냐고 항의하러 갔던 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혜지였다. 혜지는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는데 딱 8분이 지나고 내가 혜지의 시선을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벽 비행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저녁 약속이 있어서 다음날 점심 때 만나자고 했다. 혜지는 토론토에 들러서 바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나도 곧 들어올거라 홍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혜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도 홍대였다. 그게 언제더라...


"수성아, 너 도영이 나오는 프로 봤어?"

"도영이? 하도영? <더 글로리> 하도영?"

"아니, 진도영. 우리 초딩 친구잖아."


홍대에서 다시 만난 혜지는 나를 보자마자 도영이 얘기부터 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도영이 얘기를 안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진도영? 걔가 왜?"

"영화방송에서 인터뷰하는 거 나오더라고."

"인터뷰? 뭔 인터뷰?"

"천문학과 교수가 보는 <돈 룩 업>이라고, 교수 세 명 인터뷰했거든. 도영이가 카이스트 교수래."

"어? 나 어제 카이스트 갔다 왔는데?"

"너 도영이랑 연락해?"

"연락은 무슨. 안 본 지 삼십년 넘었지."


그날 도영이 텔레비전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파란창, 빨간창, 초록창을 샅샅이 뒤졌다. 동명이인이 꽤 있었다. 소속 학교와 전공을 넣으면 홈페이지로 바로 갈 수 있는데, 카이스트 천문학과에 진도영 교수는 없었다. 일단 카이스트에 천문학과가 없었다. 이런 어출쌍생같은 상황을 봤나. 혜지가 교수 세 명의 소속 학교를 셔플했을 가능성도 있다. 방송사 유튜브에서 다른 교수들의 소속 학교를 알아내려다가 말았다. 알아내면 뭐하나.




십 년에 한 번?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진도영을 검색한다. 도영이 진학한 대학교는커녕 중학교도 몰랐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은 한번도 레이더망에 걸려들지 않았다. 세평이는 검색을 하지 않아도 잘만 걸려들던데. 짜증날 정도로 여기저기서 보이던데. 길에서도 대학교에서도 공연장에서도 싸이월드랑 인스타에서도 보이던데. 도영이 넌 왜 흔적이 없냐. 혜지는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지만 다른 친구들과 접점이 있었다. 한편 집도 가까웠던 도영은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다.


그게 언제더라...


나는 내 눈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하이틴 로맨스를 사러 가자고 조르는 도영과 조기졸업한 이십대 교수님 연기를 하는 도영이 같은 사람인지 늘 헷갈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