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문고

단편소설 <구슬>

하루에 다섯 단어만으로 행복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다 그 다섯 단어, 열 단어가 당연해지고 욕심이 많아지면 끝없는 부족함에 파묻히게 된다. 욕망과 결핍의 노예가 된다. 나를 향해 들려주는 말, 나를 향해 적어주는 글이 처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다.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읽고 싶었다.




추석을 앞둔 일요일, 영어 과외 수업이 현장학습으로 대체됐다. 중간고사 무료특강 이후로 첫 수업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부터 미소의 사촌오빠 무상에게 영어과외를 받았다. 도영은 여전히 학원 경험이 없었다. 도영의 새로운 단짝이 된 미소가 졸라서 미소 엄마가 도영 엄마를 설득했다. 그룹과외 1인당 수업료는 학생수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모두를 위해 도영의 엄마도 도영을 보내주었다. 도영은 공부습관이라는 것이 전혀 없던 대신, 선생님이 알려주는 것을 빠르게 습득했다. 발전하는 도영을 매일 칭찬하면서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모른척했다.


현장학습은 서점에서 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다음 학년을 위한 선행 교재를 탐색한다는 핑계로 연주문고를 방문해 우리에게 추석 선물을 사주기로 했다.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지 못하던 도영과 혜지는 들뜬 표정으로 서점 안을 돌아다녔다. 전에 읽던 책으로 직진한 미소는 구석에 앉아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선생님과 외국 소설 코너에 나란히 서서 선생님이 빌려주셨던 <걸리버 여행기>를 내밀었다. 선생님은 말없이 책을 받아들었다. 책의 뒷표지와 내지 사이에는 편지가 있었다. 하얀 봉투 속 하얀 종이에 검은 줄과 테두리가 있는 편지지 두 장에는 모나미 볼펜으로 가득 채운 나의 글씨가 있었다. 나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수성아! 너 '독신주의자'야?"


곳곳에 흩어져 있던 미소와 혜지, 도영이 내 이름을 듣자마자 귀를 쫑긋하더니 일제히 나와 선생님이 있는 서가를 주목했다. 내 이름이기 전에, 서점에서 듣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 낯설었다. 미소는 곧 읽던 책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갸우뚱하는 혜지를 도영이 어디론가 끌고 갔다. 둘은 내 시야를 벗어난 곳으로 사라졌다.


선생님은 펼친 책의 안쪽에 반쯤 펼쳐진 편지를 놓고 읽던 중이었다. 내 귀가 빨개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 옆에서 읽으라고 쓴 편지는 아니었는데.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확인하라고 소리없이 고백한 것이 아니었는데.




도영이 좋아하는 책은 우리집 문턱을 넘을 수 없는 책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림이 없는 책을 좋아했다. 삽화가 들어간다면 아주 오래 전에 그린 듯한, 혹은 판화적인 그림이어야 했다. 학습만화라면 한겨레신문에 나오는 풍자만화 같은 그림체로 그려져야 했다. 책이 부족하면 어른책을 구경했고, 몇 권은 읽어보려고 했겠지만 재미없었다. 책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생일파티가 열리는 친구 집에 놀러가면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흩어지자마자 책이 있는 방으로 조용히 숨어들었다. 아이들 놀이보다 책에 빠지는 나를 보고 수군거리거나 우리 엄마한테 부러움을 표하는 엄마들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우리집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유치한 그림책과 만화책, 내가 펼쳐본 사실을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책을 구경했다.


​잠깐 구경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그 책들을 소장할 필요는 없었다. 만화는 텔레비전으로 보거나 게임으로 창조할 수 있었다. 책으로 만화를 볼 필요가 없었다. 책으로는 독립운동을 한 조상님들 이야기를 읽었다. 스웨덴, 러시아, 포르투갈 동화를 읽었다. 내 책이라는 애착은 없었지만 잘 모르는 동네 오빠가 중학교에 가면서 물려준 전집도 읽었다. 활자가 작은 책들이었다.




무상은 미소와 혜지, 도영에게 그림이 거의 없는 동화책을 한 권씩 고르게 했다. 나는 어른용 셜록 홈즈 전집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계산을 마친 책을 들고 아이들이 이미 밖으로 사라졌다는 것도 몰랐다.


"무거워서 다 못 들고 갈거야. 오늘은 네 권만 사줄게. 크리스마스에 나머지도 사러 오자."


무상은 내가 들고 있는 1권부터 순서대로 네 권을 들고 계산대로 갔다. 책이 담겨있는 쇼핑백은 묵직했다. 미소의 집 방향으로 가는 동안 짐이 무겁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미소의 집 앞에서 일행과 헤어졌다.


"이 책 태워버릴 거야."


다른 사람들이 시야를 벗어난 직후, 도영은 화를 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