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허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우리 모두 이 책을 읽고 열심히, 용감하게, 후회 없이 내 인생 내 손으로 망치도록 하자. -정보라
화가와 과학자라는 어린시절 꿈을 통합해 하이브리드 패션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덕분에 상당한 규모의 인스타그램 여행 계정을 가지고 코로나를 통과하면서 그간 잊혀질 뻔 했던 비현실적(?)이지만 궁극의 인생 목표와 직면하게 됐다.
이십대에는 아이돌(혹은 뮤지컬배우) 출신 한국어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삼십대에는 아이돌(혹은 중년배우) 출신 한국어-영어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사십대에는 북토크 많이 하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
부모님이 공부를 강요(?)했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다행히 우리 집은 다른 공부에 비해 문학을 추앙하면 추앙했지 경시하진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이과 수학을 포함한 수능 성적표의 코어였다. 나는 독서와 문제풀이 만으로 (신기하게도) 신분상승을 했다. 그 독서량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긴 하지만.
나를 포함해 전세계 책덕후들에게 정보라 작가를 소개한 안톤 허 작가의 자서전(!)을 서둘러 읽고 자랑하는 이 시각, 저자는 대전에서 북토크를 하고 있다. 어크로스 출판사는 올리비아 랭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지만, 올리비아 랭이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어 함께 출연하는 박상영 작가의 책을 서둘러 사냥하도록 재촉했다.
내용이 궁금해 한국어판을 먼저 읽은 것이 미안할 정도로 이 작품들의 해외 마케팅은 허 작가의 지분이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번역가의 현실은 아직 시궁창이다. 달리 미화하고 싶지 않다.
문학번역은 두 언어의 피상적 이해를 뛰어넘어 출발어의 문학 전통과 도착어의 문학 전통을 잘 파악한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37p, 무슨 배짱으로
블랭핑크에 열광하는 팬들이 갑작스레 황석영 소설을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까?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43p, 불타는 쓰레기 수거통
이성복의 시론집 <무한화서>를 보면 시를 쓰는 과정에서 단어가 단어의 꼬리를 물고 나오도록 시어의 흐름을 유도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데 이는 번역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55p, 몸으로 하는 일
국문학을 사랑하기까지 오래 걸렸던 이유는 일단 대한민국이 국문학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가 자신의 문학을 '싫어하다'니 무슨 말인가.
-87p, 문학번역가의 멸종
남들에게서 주어지는 정체성 따위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해, 번역을 위해 영문학에서 배워야 하는 무엇이 아닌가 생각한다. 누가 불러주어야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도 꽃필 수 있는 자세와 마음가짐. -115p, 노위치 이야기
실패는 뭔가를 잃는 과정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연구 과정이다.
-137p, 시행만 있고 착오는 없는 사람
지식의 끝까지 갔더니 낭떠러지만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그게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해요. 낭떠러지를 받아들이세요. 그걸 인식하는 한 여러분은 제대로 번역, 배움, 삶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74p, 지식의 저주(옥스포드 강연)
겸손을 거부합니다. 지구상에서 제일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191p, 작가 대 번역가(대회 강연)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도 자신의 언어가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계인의 교신처럼 자신의 바깥에서 오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198p, 작가 대 번역가(대회 강연)
의미는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그 방향으로 손짓할 수밖에 없는 무엇입니다. 이런 절박한 손짓이 바로 번역입니다. -219p, 주제 파악하기를 사양합니다(프린스턴 강연)
연예인을 초청하고 표를 파는 축제가 아닌, 학생들이 개최하는 작은 축제(109p, 대학원에서 배운 것)의 사회자 출신이지만 그 축제들과 팩차기에도 문제가 많다. 한편 저자가 학부 생활을 했던 볼드모트 대학교 앞에 살면서 그 곳 불문과 교수님들 역서로 서재를 확장한 덕분에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볼드모트 통번역 대학원 모집요강도 여러번 읽었다.
영어 소설가 지망생 시절에 시작된 죽음의 계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년에 출간부터 하고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망칠지 다시 생각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