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세상을 구한다

완결성이 보여주는 진실 너머의 섭리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나의 모르핀, 그것은 소설



세상에 대한 분노가 끓어넘칠때 스릴러는 해독제였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과 나 하나 못 바꾸는 현실이 충돌할 때 디스토피아는 마약처럼 나를 빨아들였다. 왜 읽었냐 묻는다면 '집에 있어서' 읽기 시작한 대하소설을 향한 열정은 엘레나 페란테를 만나서 부활했다. 긴 이야기를 따라가기엔 숙취로 오락가락할 때 단편을 읽으면 정신이 확 돌아온다.


소설이라는 개연성 있는 평행우주를 탐험하면서 다른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는 독서 경험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소설만으로도 충분히 과몰입을 할 수 있는 훈련을 거쳤기에 실화는 종종 너무 아프고 스토리가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정보는 생채소처럼 부대꼈다. 소설 또는 드라마를 더욱 즐기기 위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크로스체크하지만 어디까지나 작품 감상을 위한 부수적인 정보 수집이다.


역사적 배경, 혹은 동시대의 사회 구조를 보다 치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도 사실주의 소설이나 사변소설을 가까이 두는 것이 유익하다. 배경을 깊이 사유하기 어려운 사건 위주의 뉴스, 특히 가십은 정보가 넘쳐나는 현재로 올수록 스트레스풀하다. 정말 꼭 필요한 정보라면 누군가가 알려주겠지. 안테나를 세우고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들과 기꺼이 한 배를 타고 있다면 정보로부터 고립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품격 있는 소설로부터 물어 나르는 역할을 맡는 편이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내 취향에도 분명 한계가 있지만 그 편협함을 넘어서기 위해 타인의 독서생활도 필요 이상으로 관찰하고 있다.




소설(小說)이란 무엇인가?



영어 단어 중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쇼트 스토리(short story)는 단편소설이다. 스토리(story)와 노벨(novel)은 주로 장편소설을 의미하며, 노벨의 짧은 버전인 노벨라(novella)가 중편소설을 의미한다. 왜 한국어로는 이 모든 것이 '소설'일까?


나는 오픈마인드의 아이콘이지만 책은 좀 까다롭게 고르려고 한다. 한두 권 분량의 장편소설이 친구로 여기는 책이고 너무 길거나 짧은 문학작품은 (오랫동안 회자된다면) 예술, 너무 심오한 '~론'이나 비문학은 지식이다. 예술이나 지식 그 자체는 친구보다 먼 지인, 책보다 숙제라는 느낌이다.


최근에 재독한 인생책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팬데믹 절정기에 읽은 <마담 보바리>가 전형적인 절친 역할을 맡은 책, 살짝 긴 (세미벽돌) 장편소설이다. 그 외에도 100에서 1000페이지의 19-20세기 고전을 계속 읽어왔고 읽어갈 것이다. 최종 선택을 내가 하지 않았지만 선물로 받은 <밝은 밤>, <시선으로부터,>와 같은 21세기 작품도 좋아한다. 영어권 작가들의 최근 작품들은 약간 전통에서 벗어난 경우가 더욱 설득력이 있다.


부커상 수상작, 후보작만 봐도 그렇다. 장르가 무색한 실험적 작품이 눈길을 끈다. 같은 해에 수상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과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디스토피아, 극사실주의 운문소설이 전형적 소설 형식에 대한 내면의 고집에 일침을 가한다. 민음사 카탈로그 를 받으려고 샀던 <백 년의 고독>에 이어 새 버전으로 구입한 천명관의 <고래>를 펼치는 순간 밤을 지새울 것을 예감했다. 이렇게 한국적인, 판소리 버전 마르케스라니!


소설이라는 거대 범주 안에서 형식에 관한 논의는 살짝 진부해졌다. 모름지기 소설의 미덕은 서사의 힘이고 서사의 힘은 재미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마르케스가 추앙받고, 그와 같이 스며드는 세계관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흘려 넣는 작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아프지만 살고 싶다



한국의 코로나 감염률이 최고점을 기록한 2022년 3월 15일에 첫 증상을 겪고 분노의 고전 독서를 시작했다. 모아둔 책은 충분했다. 이제 읽기만 하면 된다. 달리 할 것도 없었다. 오랜 방황 끝에 비로소 고전소설에 몰입할 수 있었다.


영어판으로 바로 도전한 책은 분량에 따라 3일 만에 읽기도 했다. 영어책 한 권을 제대로 읽는데 10년이 걸린 보람이 있었다. 영어권 작가의 영어판과 프랑스, 스페인 등 비영어권 작가의 한국어판을 교대로 읽었다. 살아야 했다. 목숨만 부지할 것이 아니라, 생동감을 느끼고 삶의 욕구를 느껴야 했다. 삶의 허무함을 느끼는 작품 속 인물들에게 호통을 치고, 끝날 때까지 싸우는 절망적 주인공을 통해 질기디 질긴 삶의 의욕을 되찾아야 했다.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욕구가 물러난 시기였다. 역경을 딛고 일어난 성공담조차 허무했다. 때로는 논픽션이기에 저자와 나의 차이가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저자가 지인이라면 모를까. 지인이라 해도 사람 속을 이해하거나 포용하는 건 아주 넓은 마음을 요구한다. 당시만 해도 오랜 책부심이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영어가 완벽하지도 않은데(과연 완벽해질 날이 오긴 할까? 굳이 그래야 할까?) 영어를 하느라 한국어가 퇴화한 느낌도 있었다. 그땐 그랬다.


소설을 읽다가 힘을 얻었다. 쟁쟁한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된 영어가 힘을 냈고, 더 이상 번역서에 스트레스받지 않게 된 한국어가 힘을 냈다. 한국 작가들의 놀라운 기량에 희망을 품었다. 비문학을 읽고 소화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비문학은 비문학의 역할이 있고, 때로는 문학을 뺨치는 작품성을 뽐내지만 일반적 의미로 지식을 전달하는 콘텐츠의 한계도 분명히 있다.


지식보다는 지혜를 전달받고, 전달하고 싶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 책등으로 문자를 익히고, 책 읽는 목소리로부터 언어를 습득한, 서재를 요람 삼아 성장했다. 책은 나의 공기와 같은 존재다.


소설이 없는 세계란, 산소가 없는 우주와 같다.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