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27. 2023

가을가을한 산책덕후의 산문시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대도시에서, 산책을 하고 살펴볼 줄만 안다면, 괴이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발견하게 되는가? 삶은 죄 없는 괴물들로 우글거린다.

-127p, 마드무아젤 비스투리




미술평론, 소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번역, 시, 에세이까지 약 20년 동안 다양한 작품 활동과 함께 스캔들을 일으켰고 19세기 중반의 아이콘이 된,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프랑스어문학의 센터인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자동소환되는 <악의 꽃>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산책덕후 레퍼런스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원조 플라뇌르(flâneur)이기도 하다.




​명철한 보들레르는 자기 시대의 '망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그보다 더 무서운 괴수인 권태를 만나게 된다. -160p, 저마다 시메르를_주해


아르센 우세 같은 사람이 쓴 <유리 장수의 노래>에서 보듯이, 또한 방대하고 웅장하나 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보듯이, 더 나아가서 여러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저작에서 보듯이, 도시의 빈민들에 대한 문제는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그 시대가 만들어 지닐 수 있는 사상의 약점이었으며, 보들레르 그 자신의 통점이었다. 세계의 숙명에 저항하는 신경증의 폭발에서는 폭력과 무상성과 혼돈이 시적인 것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기 마련이다.

-168p, 형편없는 유리 장수_주해




작고 가볍고 귀한, 나름 시집이라 여름 산책을 함께한 책이었지만 처서와 함께 책 수집에 박차를 가하느라 뒷전이 됐다. 어떤 책을 반 이상 읽게 되면 오히려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어지는데, <파리의 우울>은 주해가 반인데다 우울해서 본문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에도 손대기 싫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번주 내내 들고 다니면서도 읽어볼 짬을 내지 못했다.


주해는 읽다 말고 어차피 재독을 해야겠다며, 본문에서 기억나는 곳들만 되새겨본다. 보들레르의 재담과 프랑스어에 대한 호기심은 박제하되 억지로 공부하듯 읽고 싶지 않았다.


도시의 산책덕후, 그가 발견한 맑은 눈의 광인들이 살아 움직이는 <파리의 우울>은 드가가 연출한 컨셉 카페보다도 더 우울하지만 21세기를 서울에서 보내고 있는 입장에서는 격하게 공감도 된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의 상복에는 으레 무언가 부족한 것, 그 모습을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조화의 결여 같은 것이 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대할 때도 인색할 수밖에 없다. 부자는 자신의 고통 한 벌을 고스란히 입는다. -36p, 과부들


"그렇지만 환심을 사다니 어떻게요? 환심을 사다니...? 환심을 사다니 왜요?" 끈덕지게 묻는 그 구멍가게 주인은 필경 부조리의 논리에까지는 올라가지 못하는 저 흔해빠진 이론 벌레의 하나였던 것이다.

-56p, 선녀의 선물


우리네 수다스러운 족속들 중에는, 단두대 높은 자리에서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을 수만 있다면, 거기에다 상테르의 북소리에 의해 연득없이 말이 중단될 염려가 없다면, 극형(極刑)도 별로 싫어하지 않고 받아들일 그런 작자들이 있다. -65p, 고독


내 혼이 이렇게 날렵하게 여행을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내 몸을 다그쳐 장소를 바꾸게 하겠는가? 또한 계획 그 자체에 벌써 충분한 향락이 있는데, 계획을 꼭 실천해서 좋을 게 무언가? -68p, 계획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험속에 빠뜨리며 즐기는 것이라 해도, 신기하고 야릇하다고 치고 말았을 터이나, 그의 타산의 어리석음은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악하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이 사악함을 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장한 일이다. 그러니 악덕 가운데서도 가장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어리석음에서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81p, 위조화폐


그래서 그녀는 그리도 다정하고 그리도 열정적이다! 그녀는 가을에 사랑하듯 사랑한다.

-108p, 준마(駿馬)


그러다가, 혼자 생각했네, 어떤 일에서는 불행한 것이 좋은 것이다. 나는 이제 익명으로 나다닐 수도 있고, 비열한 짓도 할 수 있고, 또 평범한 사람들처럼 방탕에 빠질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일세. 그래서 보다시피, 나도 이렇게 자네와 똑같아졌네!

-122p, 후광의 분실




드가의 설정샷이 등장하는 표지와 역자 고 황현산 교수님을 고민하다 역자를 선택했고, 그에 대한 후회는 없다. 같은 책을 종류별로 모을 정도로 프랑스 덕후는 아니다. 한국이나 미국으로 정신 이동을 할 예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과의 만남 자체가 소중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