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Nov 07. 2023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의 이름

한강 <소년이 온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신형철(추천사)




​교도소의 검열을 겨우 통과했을 대하소설에 붙어있는 검열딱지를 떼어가며 앞서 이 책들을 읽었을 누군가의 눈자취를 따라갔던 날들이 있다. 그 이전에, 왠지 로맨스일 것 같은 어른책을 어른들 몰래 꺼내었다가 하염없이 빨려들어갔던 적이 있다.


그때 집었던 책은 (약간 성인용) 로맨스이기도 했지만 그 배경이 1980년 5월, 광주의 열흘이었다. (검열이 완화된 이후 집으로 입고된 책이겠지.) 막 열네살이 된 나는 미쳐버린 여주인공이 미쳐버린 이유를 생생하게 상상해버렸다. 끈적거리는 로맨스는 기 드 모파상이 덮어쓰기 했지만 폭력의 상흔은 보호자 입회하게 집에서 관람했던 <꽃잎>, 선배들과 단관했던 <26년>, 그리고 그야말로 친절한 이방인에게 선물받아 절친과 함께했던 <1987>로 이어졌다.


한국영화가 이룩한 장족의 발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강동원 배우에게 매우 감사하다. 한편 한국문학은 아주 끈질긴 소수의 작가들에게 치중되어 있다. 현 시점에서 작가와 작가가 아닌 사람을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 없지만, 종이책을 인쇄했거나 할 예정이거나 작가라는 대우를 받는다면 종이와 독자들의 시간에 대한 책임감은 느낄 것이다.




한강 작가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자신이 파괴될 수도 있는 취재에 쏟아부었다. 그 성취에 응답받듯 세계 3대 문학상 중 부커상의 한국 최초 수상자가 되었다. 나는 폭력에 민감한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는 그녀의 수상작을 완독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펼치면 한 시간 정도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처음부터 정주행할 각오를 다잡지 못했다. 못했었다.


​강동원 배우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 시절의 영화나 소설을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정확하게 보여준 강동원 배우에게 용기를 얻어 다시 한강의 작품에 도전했다. 이번에도 지난 세기에 어른책과 어른영화를 아직 어렸던 내게 공유했던 (군부정권이 감시했던) 보호자가 <소년이 온다>를 무심하게 건넸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114p, 쇠와 피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20p, 쇠와 피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122p, 쇠와 피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126p, 쇠와 피


퍼즐 맞추기를 하듯 신문에 실린 사진들을, 검열되어 텅 빈 공란들을, 격앙된 사설의 어둑한 반대편을 들여다봐야 했다.

-157p, 밤의 눈동자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173p, 밤의 눈동자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174p, 밤의 눈동자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먼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190p, 꽃 핀 쪽으로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207p, 눈 덮인 램프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213p, 눈 덮인 램프




고통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분노였다. 나를 혐오하지 않고 생존하려면 분노의 불꽃에도 땔감을 끊지 말아야 한다. 피폭은 끝나지 않았다. 에필로그에서  1980년과 겹쳐지는 2009년, 2014년과 2022년으로 이어지는 학살은 이곳이 휴전국임을 일깨운다. 생명을 경시하는 모두가 우리의 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미 죽은 아름다움과 찰나의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