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각각의 계절>
가장 본질적인 "두 겹의 차원"은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겹기억"이다. <기억의 왈츠>는 우연이 이끌고 간 구부러진 시간의 나들목에서 각각의 계절에 있는 '나'를 보여준다. 죄 없이 공포에 떠는 강아지도 '나'이고, 그 강아지를 함부로 괴롭히는 자도 '나'이다.
사슴벌레의 말로부터(김멜라), <어텐션북: 권여선>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아껴읽다 밸리곰만한 뿅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사슴벌레송을 부르게 했던 권여선이 돌아왔다. 리뷰의 탈을 쓴 미니픽션을 쓴 이틀 뒤 '소설가 50인이 선정한 올해의 책' 1위에 오른 <각각의 계절>,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사슴벌레식 문답' 아닌가.
<각각의 계절>을 맞이하기 전, 덜 경건한 마음으로 주정뱅이를 내쫒느라 <어텐션북: 권여선>을 읽고 김멜라 작가에게도 반했다. (마침 유진이가 김멜라의 작품이 수록된 책을 빌려주었다.) 왠지 일이 커질 것 같은 예감이다?!
<어텐션북>에 전문이 실렸으나, 본체를 통해 경건하게 받아들인 '실버들 천만사'에서 다시금 권여선을 향한 애절한 존경심이 불타올랐다. 모녀 관계를 일단 피하고 보는 나같은 독자에게 이런 돌직구를 날리다니. 이어지는 '하늘 높이 아름답게'와 '무구'에서는 지켜지지 못한 인연과 인격이 강렬하게 대비된다. 시속 1페이지를 집필한다는 저자가 제공하는, 판타지 같은 페이지 속 시간 여행은 끝없이 불편한 흥미로움 속으로 독자를 내던지고는 '어디로든 나갈수가 없'게 한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권여선 스타일에 감칠맛을 더하는 어머님들의 수다가 주인공 엄마의 목소리로 돌아올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엄마와 동생의 갈등은 참으로 피곤한 것. 남동생과 누나라는 설정은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래서 여동생과 엄마 사이에 끼어보는 경험에 온전히 공감하긴 어렵지만 첫째는 어쩔 수 없이 첫째다. (유진이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저자는 첫째의 관점에서 둘째를 관찰하는데, 의외로 그것이 자기관찰일지 모른다. 이렇게 넋놓고 엄마들의 드립에 무장해제를 당하다 마지막 작품에 또 뿅망치를 맞을 수 있거든?
'각각의' 온도차가 있지만 원점(?)인 사슴벌레송으로 돌아와 그보다 더 엉킨 기억이 있었는데, 여태 몰랐지? 라고 뒤통수를 치는 '기억의 왈츠'는 보는 내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았다. 저자의 기억을 파고드는 건 내 몫이 아니기에, 나는 내 기억을 파고들기로 한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했다.
-50p, 실버들 천만사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77p, 실버들 천만사
그 일이 아니었어도 다른 일이 생겼을 수 있고 그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끊겼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었을 거라고, 다시는 못 만나는 식으로는, 다시 만나서는 안 되는 식으로는 아니었을 거라고, 소미는 생각한다. -131p, 무구
진짜 귀신같은 게, 내가 언제 약간 행복해지고 내가 언제 약간 기분좋아지는지를 딱 노리고 있다가, 딱 재 뿌리는 시점을 엄마는 귀신같이 아는 것 같아.
-154p, 깜빡이
그래, 무섭지. 무서운 말이다. 구밀 그런 말은.
구밀은 입에 꿀을 바른다는 뜻인데 뭐가 무서워요? 복검이 무섭죠. 배에 칼을 품고...
-182p,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그중 제일 무서운 게 남의 목숨을 빼앗은 명채란다.
-186p,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238p, 기억의 왈츠
리뷰 아래에 계속>>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이 수록된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리뷰에
유진이가 등장하는 미니픽션이 포함되어있다.
https://brunch.co.kr/@swover/341
흘러간 옛 노래는, 단지 예전에는 인기를 구가했으나 이제는 유행이 지나버린 노래인 것만이 아니고, 우리가 그때는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던 갈망과 탐색을 우리 대신에 오래 기억하고 곱씹고 있다가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그것을 다르게 다시 부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영혼의 보조 기관이기도 하다.
-270p, 영원회귀의 노래(권희철)
모든 작품에 '각각의' 풍미가 가득했으나, 오르고 보니 절벽이고 이제 와 돌아갈 수 없는 그 곳에서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자유낙하하는 기분으로 '기억의 왈츠'를 춘다. 숲속 식당 왜 자꾸 가평인 것 같지? 자유로 타고 가는 곳이면 파주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