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나로 말하자면 대학에 입학하면서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감당못하고 분방하고 무책임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수업은 거의 빼먹다시피 하고 모든 시위와 토론, 뒤풀이에 꼬박꼬박 참석했고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서도 누구든 붙잡고 더 마시려 했다.
-14p, 사슴벌레식 문답(권여선)
우이동, 강촌, 대성리....로 이어지는 라임에 함께 웃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이제는 거의 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뉴욕대 기숙사를 점령한 블레어와 바네사와 조지나처럼 915동을 점령한 나의 수영이와 유진이와 성희(가명) 중에서 지금도 연락을 하는 것은 유진 뿐이다. 얼마 전 수영이 단톡방을 (이미 있는데도) 새로 팠지만 나는 유진에게 갠톡을 보냈다. 당분간 수영이와 대화하지 않겠다고. 그 방에서 안부를 확인할 다른 친구는 이미 며칠 전에 장례식에서 만났다고.
우리는 언제부터든 이렇게 됐어. 이유가 뭐든 과정이 어떻든 시기가 언제든 우리는 이렇게 됐어. 삼십 년 동안 갖은 수를 써서 이렇게 되었어.
뭐 어쩔 건데?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27p, 사슴벌레식 문답(권여선)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소설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행히 그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도시의 구월처럼 내 의도는 모조리 가짜이고 난 기술자에 불과하니.
-44p, 작가노트(권여선)
비극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 증명을 위한 육하원칙이 아니라 그 비극을 겪는 이의 기막힌, 애끓는 내면이다. -47p, 리뷰(양윤의)
나는 그녀가 속물이었다고 단정짓고 싶지 않았다. 입학 후 첫 집회에서 서로의 존재를 각인할 수 밖에 없었고, 졸업 사진도 함께 찍었고, 더 자세한 이야기는 프라이버시 문제로 공개할 수 없는 가까운 친구였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모종의 경쟁 관계였고 불가능한 우정 속에서 위태로운 관계를 지속했다. 어쩌면 트로이카에 대한 집착이 낳은 참사였을지도. 유진과 나는 다른 친구와도 트로이카를 이루었지만 이 삼각형에서는 유진이 이탈했다. 재결합을 시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른에게만 보이는 매력의 소유자였던 성희는 은근히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동성친구가 거의 없어서 내게 의지했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나의 공사다망을 이해하지 못해 싸우기도 했었다. 성희는 그냥 '옆방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청자인 나는 그녀를 '귀찮게 하는 과대표'였기 때문에 너의 하소연, 혹은 뒷담화 당사자가 나이므로 자제해줄래? 성희와는 그야말로 빨리 끝났다. 비록 나와는 친했지만 (성희가 한참 아까운) 이상한 오빠랑 사귀는(아오 답답한) 것도 그냥 넘어갔다.
학교는 왜 다니고 공부는 왜 하는지, 셀카는 왜 찍고 비공식 모임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망했다고 말하면서 왜 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지 정말 모르겠다. -65p, 썸머의 마술과학(최진영)
거창한 것을 꿈꾸는 인간, 단숨에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버리고 일거에 국면을 전환하고 대번에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거창하고도 헛된 꿈에 취해 현실을 사소하고 너절하고 지리멸렬한 것으로 취급하고 그 바람에 자신과 그 주변의 삶을 걷잡을 수 없이 엉망으로 만드는 인간, 그것이 이상혁이라는 인간 유형이고 이봄이 자기 안에서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는 인간 유형이다. -91p, 리뷰(권희철)
그런데 비존재의 기준은 무엇인가. 살과 피와 뼈, 혹은 만질 수 있는 무언가로 이루어져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일컬어서 존재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안 그러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존재하지 않도록 만드는 즉각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성립하고 마니까. 그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과 코를 가리는 것이다. -186p, 있을 법한 모든 것(구병모)
나는 조금 감상적인 마음이 되었는데, 더이상 낮이 아니지만 아직 밤도 아닌 미확정의 시간대가,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을 그었다 지우는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314p, 빛이 다가올 때(백수린)
전년도 작품집에서 읽은 백수린과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은 서유미, 그간 궁금했던 구병모를 읽었다. 아직 완독하지 못한 채 <아가미>와 권여선 어텐션북을 구입했는데, 먼저 사 놓은 구병모 어텐션북도 발견했다. 십여년 전 사놓고 못 읽은 최진영부터 다시 순서대로 최은미와 손보미를 읽고 권여선은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 책소개를 쓰고 이틀 뒤, 권여선 작가와 구병모 작가의 해당 작품이 수록된 소설집이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1, 2위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