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인생이 농담을 하면 인간은 병드는데, 농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병들지만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아서 늘 배달만 하려 드는 사람도 그 자체로 환자다.
해설, '호모 파티엔스'에게 바치는 경의(신형철)
지난 가을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뒤늦게 갑자기 권여선 작가에게 빠져버렸던 그날 인친 북캣님이 <안녕 주정뱅이>를 알려주셨고 <권여선 어텐션북> 인터뷰에서 저자 본인은 <각각의 계절>을 추천했다. 이틀 뒤 최신수상작 '사슴벌레식 문답'이 수록된 <각각의 계절>이 소설가픽 올해의 소설로 선정됐고 자연스럽게 그 책을 먼저 읽고 리뷰했으나 계획없이 들렀던 서점, 도서관에서 책등테라피를 할 때마다 <안녕 주정뱅이>와 눈이 맞았다. 마침내 한국소설 지름신을 만났던 날, 장바구니에는 권여선의 구간인 <안녕 주정뱅이>와 <아직 멀었다는 말>이 나란히 들어있었다.
의식적으로 챙겨 읽지 않으면 계속 마감일(?)이 밀리는 외국소설, 벽돌 같은 장편소설을 챙겨 읽는 틈틈이 나만 모르는 작가들의 단편을 찍먹하면서 다시 권여선으로 돌아올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정말 이 책이 필요한 순간이 올거라 예감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브런치스토리에 연재하는 에세이를 써야 하는데 살짝 쓰기 싫었던 날 <안녕 주정뱅이>를 개시했고 5분도 안되어 폭풍오열했다. 눈물의 독서테라피는 글태기를 단숨에 없던 일로 만들었다.
권여선 작가가 2013년부터 2015년 사이에 발표한 소설들을 시간순으로 아껴 읽었다. 가장 과거에 발표했고 가장 먼저 등장하는 '봄밤'의 주인공들은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풍파를 심하게 겪었다. 그래서일까, 작품 외부의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의 고통이 가중되었음에도 (2013년에서 2015년 사이) 작품 내부로 돌아가면 주인공들이 점점 젊어지고 상대적으로 희극 또는 희극처럼 보이는 덜 무거운 비극으로 옅어지는 느낌도 없지 않다.
해설을 집필한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권여선의 소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268p)'. 작가의 말을 통해 고백한 논픽션의 일화처럼 자칫하면 주정뱅이가 압도할 수 있는 상황도 있다. 술을 마셔서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고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오지랖으로는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심연이 저 멀리 보일듯 말듯하다.
아주 오래전, 원시였던 그때는 너무 어려서 발견할 수 없었고 지금은 '늙어가면서 공감능력이 탁월해진 덕인지 심신이 미약해진 탓인지(51p)' 과몰입하는 경향이 있어 근시를 핑계로 아픔과 거리를 두려 한다. 내가 직접 겪은 일에도 슬퍼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던 과거의 죄책감(부채감)은 공감하고 싶어하는 현재의 발목을 잡는다. 오지랖을 사치라고 주장하며 술을 찾는다.
위스키 남았으면 그것도 좀 넣어줘. 규가 말했다. 하 그 생각을 못했네. 위스키 남았냐? 남았지. 그럼 훈이 너도 넣어서 먹어. 속이 훨씬 편해져. 그래야겠네. -69p, 삼인행
사실 나는 가족들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온라인 관계를 끊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였고, 오로지 내가 쓴 글, 내가 만든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우주였으니까. -97p, 이모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문정씨.
놓아야 살 수 있어요. -135p, 카메라
그녀는 그가 우연히 날아들어온 새 때문에 빚어진 자신과의 인연을 다시는 못 볼 찰나의 스침으로 여기고 보들레르처럼 거기에 미혹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녀는 점심식사 후에 소주를 마실 참이었다. -163p, 역광
물론 그들은 여전히 나비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지만 14년이라는 시간이 그들의 어딘가를 붙잡아 어딘지 모를 함정에 반쯤 파묻어버린 것 같았다.
-190p, 실내화 한켤레
술을 마신 다음 날에는 모닝커피보다 해장술이 맛있다. 그정도로 중증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약속이 모여있어서 이번주에만 해장술을 두번이나 마셨다. 오늘은 프렌치토스트와 와인이 있는 테라스 카페에서 아이스 커피와 고구마토스트를 먹었다. 와인과 피자 또는 맥주와 스시를 먹고 싶었는데 아는 길에서 길을 잃었고 GPS를 확인해보니 그냥 아는 길이 아니라 영혼을 반쯤 파묻어버린 곳에 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