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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ug 31. 2024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권여선 <아직 멀었다는 말>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천사(김애란)


'슬픔의 마에스트로'가 분노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해설(백지은)



엘레나 페란테, 아니 에르노, 토베 디틀레우센이 어린 시절 및 청년기 계급 상승으로 인한 유년기와의 단절, 그에 따른 (비유적인) 이중국적자의 고립감-혹은 서로 다른 아비투스의 대립 상태-에 대한 회고를 유발하는 작가라면 권여선은 이십대 초, 타오르는 분노의 초상으로 현재의 멘탈을 끌어다놓는다.


이건 마치, 순간 이동인가?


옅은 퀴어의 흔적, 징글징글한 가족들, 자세히 기억함과 기억 안 남 사이의 출구 없는 매트릭스로 남아 있는 <각각의 계절>, (가족들로부터) 독립된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와 그런 세계에서 만들어 낸 사랑이라 더욱 처절한 상실과 따라오는 알콜과 약간의 마술적 사실주의가 뿌려진 <안녕 주정뱅이>를 읽었다. 두 번째 책을 읽을 때만 해도 '권여선 의존증'이 있었으나 두 권을 완독한 후에는 다른 작가들의 다른 매력, 혹은 더 매운 맛에 끌린 것 같다.      




권여선 작가의 경우 과거에 더 매웠다는 풍문이 있었다. <아직 멀었다는 말>을 포함해 시간 순으로 가장 오래된 책은 <안녕 주정뱅이>인데 아마도 그 시기(약 10년 전)에 조금 순한 맛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 해 그 봄을 기점으로 섬세한 분노와 충분한 애도가 더욱 필요해졌으니까. 전에도 후에도 존경 받는 작가들이라면 그 시점에 작풍이 달라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요약하면, <아직 멀었다는 말>은 약간 매운 맛이다.


<안녕 주정뱅이>를 읽을 때 속수무책으로 눈물 범벅이 되거나 현실의 술, 책 속의 술, 책 속의 인물이 상상하는(?) 술의 삼각 관계에 비스듬히 의존했다면 <아직 멀었다는 말>을 읽는 동안 서러움과 분노를 어떻게 삭일지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이건 마시고 잊어버릴 성격의 지나가는 시련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공격은 강도가 커지고 부당함을 감내하던 주인공들은 자해를 시작한다. 저자의 50대를 대표하는 세 권의 책에서 주인공이 50대인 작품들은 후에 다시 (50대의 눈으로) 읽어보겠지만 이책의 대표작인 '손톱‘과 '너머'와 같은 작품에서 느껴지듯 젊은 주인공들이 오히려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마치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하는 대신, 어느 장면은 치밀하고 정확하게 기억하는 저자의 청년기가 스며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도 청년기를 소환한다.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하는 대신, 어느 장면은 손에 잡히는.  




그래도 소희는, 아직도 소희는, 엄마랑 언니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65p, 손톱


당사자는 자조라고 한 말이겠지만 N에겐 저주로 들렸고, 자조를 자주하면 저주가 되는 거지, 라고 N은 복수하듯 생각했다. -124p, 너머


엄마, 우리 중에 누구라도 먼저 손 아프면 바꿔 잡자고 말하자. -165p, 친구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러나 그때에도 알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207p, 재


묵언의 시간이 번개처럼 번쩍 지나가고, 이동한 경로는 불타버렸지만, 나는 이미 다른 곳에 있게 된 거지. -246p, 전갱이의 맛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갖가지 고통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불행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할 부당함, 불공정, 불평등이다.

-264p, 해설_당신이 알고 있나이나(백지은)



무거운 책이라 가볍게 끝맺고 싶다. 이번 책에는 경춘선, 중앙도서관처럼 추억의 아이템(?)이 등장하지 않은 대신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사건(이건 가볍지 않군!)과 한강의 철교와 '파묘' 특히 이장을 둘러싼 남매들의 동상이몽이 묘한 위로를 건넨다. (우리 집만 저런 게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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