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쩌다 보니까 나는 본의 아니게 복수 전문 작가가 된 것 같은데 많은 경우 화가 나서 글을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421p, 작가의 말
방금 알았다. 그때 내가 왜 예술로부터 도망쳐서 예술로 귀의(하려고)했는지. 왜 모국어를 들으면 화가 나고 안 하려고 했던 취업을 남들이 다 하니까 불안했(부러웠)는지. 왜 죽고 죽이는 스릴러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해야했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시제불일치가 심했던 이상한 진공상태였다. 이제보니 시대를 앞서와 있었던 2000년대 초의 예술적 성취를 타다 만 종이쪼가리처럼 만들어놓은 야만의 시대.
나는 항상 복수를 꿈꿨다.
정보라 작가가 속박과 복수물을 집필하던 시절 <아내의 유혹> 미국버전이라 불리는 <리벤지>라는 드라마가 나왔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본 2018년 시점에서 놀랍도록 후진 <여인천하>같은 장면으로 가득한 이 복수극이 내가 좋아하는 오바마 미드의 초창기 버전, 다양성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그 다양한 조짐이 가득했던 작품이었다. (내 인생 이상형이 된 남주가 바이섹슈얼로 등장한다!) 리벤지(Revenge)는 복수라는 뜻이고, 이 드라마의 오프닝은 '두 개의 무덤을 준비하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멋있었던 한국의 복수자들은 사라지고 있었다. 있긴 있었다. 있었는데 너무 적었다. 드라마틱한 복수는 장서희, 하지원으로 요약된다. 복수욕구를 채우지 못해 갈증에 시달리다가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만나, 복수를 탐닉하는 스릴러 덕후로 재탄생했다. 방구석덕후 러시아언니 리스베트. 내 사랑, 리스베트.
조주관의 <도스토예프키가 사랑한 그림들>로 미리보기했던 시베리아 유배지를 재현한 '완전한 행복',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3부작(간첩의 후예!)에서 거슬러 올라간 듯한 'Nessun sapra'를 읽고 코펜하겐 삼부작에서 소환한 북유럽의 춥고 배고픈 고독을 만났다. 토베 디틀레우센보다 먼저 구입한 페터 회의 코펜하겐 이야기도 있었다. 어느덧 입춘이 지났다. (여전히 겨울이다.)
봄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직 추울때 코펜하겐을 마저 접수했다. (스웨덴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도 곧 읽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전쟁과 평화>는 생일 선물로 미뤄야겠다. 정보라가 소개한 다닐 이바노비치 유바표츠와 브루노 야셴스키까지 읽으려면 또 마음이 급해진다. 독서는 늘 다른 독서를 부른다.
진정한 자유는 도망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로부터 끝없이 도망치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40p, 나무
그들은 아마도 더 작은 집으로 옮기고, 더 긴 시간 더 힘들게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더 나아질 것이 없는 미래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고 시시각각 싸워야 할 것이었다. -106p, 가면
오히려 한국의 보통 부모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가 무엇이든지 더 잘하고 최고로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지적하여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
-157p, 금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해도 아마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164p, 금
인간의 신체는 흥미로워요. 하지만 이런 형태의 신체는 구-속이고 제-약이에요. 고-통이에요.
-208p, 물
그래서 그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기묘한 방식으로 완벽하게, 허무하게 자유로웠다. -313p, 휘파람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사랑, 오직 내 사랑만이 너를 내 것으로 만든다 -378p, Nessun sapra
하늘과 땅 사이에 펼쳐진 인간과 짐승의 세상에서 죄책감과 분노와 증오를 짊어지고 그는 오로지 혼자였다. -407p, 완전한 행복
그러므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나 자비가 아니었다. -416p, 완전한 행복
정보라의 신간도 읽기로 결심했으나 여름에 사서 반년을 묵힌 이 책이 갑자기 끌렸다. 다 그럴만한 우주적 이유가 있었다. 특히 작년 1월에 출간된 이 책은 겨울에 읽어야 한다. 정보라의 10년 전, 나의 서른 즈음에, 우리 속에 있던 분노에 찬 막막함과 황홀한 전래동화 스타일로 재회했다.
체념 속에 자리한 생의 의지야말로 최소한의 존엄이기에 정보라의 호러는 영혼의 냉수마찰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