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예술의 언어는 구부러져 있다. 낯설고 기괴한 세상을 새삼 천천히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낯설고 기이하게 구부러진 언어가 필요하다.
-415p, 작가의 말_낯설게 보는 세상
낯설다. 하지만 빠져든다. 어린 시절에 즐겨 읽었던 우리나라 전래 동화, 중국과 유라시아의 다양한 민담, 스웨덴과 핀란드의 동화가 머리 속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정보라 작가 입문작이었던 ‘저주토끼’가 수록된 동명의 작품집과 <여자들의 왕>은 환상동화처럼, 혹은 실크로드 여행기처럼 다가와 스르륵 스며들었다.
인간의 탐욕과 뒤틀린 잔인함을 한 발 물러서서 (낯설게) 바라본다. 필요한 것 이상을 탐하지 않는 동물은 얼마나 순수한가. 상처입고 학대당한 동물은 인간을 은유하는 동시에 인간에 의해 훼손된 세계를 보여준다. (기묘한 연구소 괴담 끝판왕이 나타났다, 브런치북 <인생작가 수집기록>, 2023) 재작년 생일 선물로 받은 <저주토끼>에 이어 작년 생일에는 셀프 선물로 <한밤의 시간표>에 펀딩했다. 작년 초에 출간된 <아무도 모를 것이다>는 같은 해 여름에 구입해서 올 초에 읽었다. 겨울에 읽으면 좋은 책이다. 책속의 여행은 코펜하겐으로 이어졌다.
재고가 떨어지니까 불안해서 다음편인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를 준비해두었다. 매주 최소 4일은 쓰고, 최소 4일은 읽는다. 둘 다 하는 날도 있고 둘 다 안 하는 날도 있다. 지난 8월에는 연재 브런치북과 포토덤프 챌린지로 매주 다섯 개의 글을 발행하면서 총 여덟 편의 서평을 썼다. 정보라,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작가의 개막 강연을 포함, 총 4일에 걸쳐 관람한 서울국제작가축제 이후로 방전되기 시작했다. 읽기와 쓰기 치료는 복수명상… 아니, 원혼을 달래는 작업이었다. 책으로 쌓은 책장 칸막이의 코너 자리에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를 꽂아두고 책등테라피를 했다.
작가축제에서 구입한 <귀신들의 땅>을 읽다가 이 책을 꺼냈는데 역시. 그래 이 맛이야. 하면서 또 빠져들었다. 앞서 읽은 네 권의 단편집과 조금 다르다. 대체로 인간의, 대체로 이곳의, 대체로 살아있지만, 확실히 살아있는지는 모르겠는 이야기. ‘감염’과 ‘내일의 어스름’이 특히 인상적이다. 괴물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착취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존재한다.
나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그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30p,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찬물이어야 피가 잘 빠지거든. 더운물을 쓰면 피가 굳어버려. -154p, 리발관의 괴이
우리가 막 큰 걸 바란 게 아니잖아? 서른이 넘으면 어쨌든 직장이 있고, 결혼해서 아이가 있고, 안정된 생활이 있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고작 그거 이루기가 왜 이렇게 힘드니.
-196p, 내 친구 좀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은 상실할 수 없다. 부재하는 것은 또한 존재하지 않으므로 용서할 수도 용서하지 않을 수도 없다. -271p, 사흘
일상을 무심하게 이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관계없는 타인 앞에서 숨 쉬고 웃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슬픔과 상실감이 엷어지려면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나야 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나 결심으로 재촉할 수 없었다.
-383p, 타인의 친절
구전 문학에서 소설, 영화로 계승된 호러 판타지는 역사의 반복을 경고한다. 마녀사냥과 집단 학살은 많은 곳에서 자행되었고, 살아남은 자의 피눈물은 마를 날이 없다. 이야기는 원혼을 불러내고 또 달래기도 한다. 정보라가 불러낸 어느 시절의 고통은 문장 속에서 반복되지만, 또한 흘러내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