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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11. 2024

타인이라는 공포와 시크한 인류애

구병모 <있을 법한 모든 것>

<파과> 리커버에 이어 계간 문학동네 2023 겨울호에 실린 '적개'라는 단편을 읽고 내멋대로 조금은 단편적인 해석을 했다. <아가미>와 <파과>를 읽기 전에 <있을 법한 모든 것>의 표제작(이자 나의 구병모 입문작)은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읽었고 <파과>와 '적개'의 중간 혹은 그 두 작품의 전후로 <있을 법한 모든 것> 어텐션북에 수록된 '노커'를 읽었는데 '노커'와 '적개'야말로 <파과>가 예견한 일종의 시크한 인류애를 계승하는 작품처럼 다가왔다. 모르겠다. 우후죽순처럼 매일 차고 넘치는 신간의 길고 장식적인 제목에 끝없이 노출되느라 어지러워서 그만, 정갈한 두 음절의 제목을 선호하게 된 것일지도.




<파쇄>, <있을 법한 모든 것>, <단 하나의 문장> 은 같은 날 두 곳의 책방에서 구입했다. 세 권을 가지고 귀가하여 나른한 몸을 뉘인 채 <파쇄>를 읽고 잠들었는데 그로부터 2주가 지나서야 <파쇄>를 품은 <파과>의 리뷰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미 <파과>는 완독한지 오래였다. 당시 밀려있던 완독책을 나름의 순서로 배치하느라 계속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있을 법한 모든 것>의 전반부를 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각의 단편을 읽은 날짜를 전부 기록하지는 않는다. 하면 좋지만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초독인 '니니코라치우푼타'를 포함해 '노커'와 '있을 법한 모든 것'은 클리셰와 납작하다못해 0에 수렴하는 평면에 무한히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짜증나는 클리셰적인 인물과 그럼에도 약간의 몽상을 통해 숨 쉴 구멍을 확보해주는 판타지로 연결된다.


한편 <있을 법한 모든 것>을 읽는 동안 마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 작품(들)이 바로 이어진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읽었으리라. 그러나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은 어떤 의미로는 극사실주의라 뼈 맞는 느낌이었고 (심지어 이 글의 초고를 작성할 때 이 뼈를 무려 권여선 작가에게 맞아서 너덜너덜해진 상태이기도 하다.) 'Q의 진혼'은 몽환적인 건 둘째치고 '노커'와 같은 잘 짜여진 스릴러 영화를 기대했다가 해독 불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온 듯한 아리송한 어리둥절이 남았다. 여기서 재기 불가(?)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렵 서울국제도서전을 기점으로 외면할 수 없는 신간이 밀물쳤고 이런 저런 이슈(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를 쳐내면서 시즌 특집으로 더 많은 장르의 다양한 책을 읽어내느라 잠시 주춤했다.


어, 그러니까....아 맞다. 완독해야지.


그야말로 책 한권을 끼고 있을 법한 모든 것이 벌어졌다. 이미 정주행하는 작가들의 이전 작품을 읽으면서 수시로 마음이 변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생물학적 데이터를 모바일로 전송하는 게 가능해질까? 일단 상상을 해보자. (영혼의 데이터화에 관한 작품은 국내에서도 김초엽과 황모과 등의 작가들이 다룬 적이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이와 관련한 언급을 오래 전에 했던 것 같아서 최근에 읽은 부분을 다시 확인했는데 주제는 좀비였고 그에 반해 희망적인 SF는 명랑 판타지라 칭하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 '미래시장' 도입부, <타오르는 질문들> 265-266p) 그렇다면 구병모의 '이동과 정동'은?


같은 책의 포스트 코로나적 비대면의 공포 속에서도 특히 조금 먼저 발표된 '이동과 정동'의 경우 디스토피아 속에서 미래 과학과 초자연 현상 혹은 사이비 종교가 교차하는 폐쇄된 연구소가 등장한다. 명랑 판타지라기엔 으스스한 호러적 스릴러에 가깝다. 이번 여름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통해 20세기 노르딕 느와르의 시작을 목격하기도 했으나(필자는 밀레니엄 시리즈의 지독한 팬이다.) 최근에는 스릴러 작가를 많이 읽지 않아서 모르겠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밀레니엄 시즌에 많이 읽은 (마중물인)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SF적 스릴러를 많이 썼다.




'노커'와 표제작에서 강조되는 비대면(시대)의 공포는 이미 극대화됐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그야말로 스몰토크조차 어색하기 그지없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와 같은 대도시에서 예상치 못한 곳의 타인의 존재라던지, 공공장소에서 남아도는 공간을 활용하지 않고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는 행위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용납불가한 행위를 자각하지 못하고 더욱 빨라진 비대면(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기성세대 또한 공존하고 있다. 이미 동년배들이 기성세대의 기성세대에 동화되어가는 와중에 그 질척함에 넌더리를 낼 줄 아는 구병모 작가와 같은 사람은 그 넌더리를 너무 잘 아는 독자들의 환호를 받을 수 밖에 없다.



*2024년 7월에 쓰고, 10월에 수정함

(데이터 분실로 일부 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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