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아가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194p
구병모의 대표작 <아가미>와 <파과>는 제목만 봐도 야생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책표지만 수백, 수천번을 봤는데 어쩐지 질리지가 않았다. 질렸다면 차라리 책방이라는 공간에 질렸을 것이다. 최애 장소도 너무 자주 가면 질린다. 오늘도 온라인 서점 당일 배송을 받았지만 책등테라피의 과잉(?)을 막기 위해 오프라인 서점은 못본 척.
나의 구병모 입문작은 <있을 법한 모든 것>인데, 단편집을 소개한 어텐션북을 구입한 뒤, 까맣게 잊고 있다가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표제작을 읽고, 이어서 단편집 대신 오랫동안 눈독들여온 <아가미>를 주문했다.
(이전 서평 참고) 찍먹 당시에는 권여선과 백수린이 압도적이었으나 어차피 세 작가 다 정주행할 예정이니, 지금이 바로 <아가미>를 읽을 때다.
<아가미>에서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이 자동소환되는 리버밸트를 배경으로 곤을 찾아오는 해류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곤의 목숨까지 위협한 신체적 특별함은 백수린의 키워드인 '빛'이기도 하다. 다만 구병모 작가는 그보다 그로테스크하면서 마술적 사실주의를 암시하는 '아가미'를 전면에 내세운 듯. 곤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전설적인 존재는 정보라의 <여자들의 왕> 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도 등장했던 그 수룡과 닮아있다. 해류가 강하의 이름을 말할 때 숨을 고르듯, 나는 내가 치히로가 아닌데도 하쿠의 이름을 말할 때 숨을 고르게 된다. 이름에서 수룡이 느껴지는 존재는 차라리 강하였다.
강하와 해류, 곤과 이녕의 운명적 마주침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웠고 특히 여성 캐릭터를 묘사할 때 클리셰를 진열하고 비틀어내는 구병모의 필살기가 드러나서 짧고 강렬할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천명관의 <고래>와도 묘하게 거울상을 가진다. 여성 서술자가 전달하는 주로 남성인 주인공들의 불안정한 막막함은 브로맨스라고 하기엔 무겁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무게잡지 않아서 좋았다. 한번도 부르지 못한 곤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는 강하의 마음은 사랑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석류 열매처럼 드러난 속살의 두근거림은 명백히 생명의 움직임이었다. -40p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49p
그 밖에도 그 이름은 서로를 향해 몸을 부대끼다 부서지는 물방울의 내밀한 언어를 떠올리게 했으며, 그토록 낭만적인 이름을 지닌 사람이 하필이면 그 이름의 뜻을 담은 물에 스스로를 포기할 리 없었다. -61p
눈부신 것, 빛나는 것, 귀한 것, 좋은 것은 숨겨놓고 혼자만 아는 거야. 남하고 나누는 게 아니란다.
-89p
그 어느 쪽도 강하 그 자체였으며 자취 모를 부모의 존재는 그중 어떤 모습에도 기능하지 않았다.
-109p
그러면서도 그게 자신에게 없다는 이유만으로 도리어 좋아하기도 하는 모순을 보여요. -121p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185p
호수를 옆에 끼고 살아온 사람들. 물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모든 물질의 응집력은 수분을 전제로 하잖아요. -192p
그 두 가지란, 하나는 모든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가정은 화목하리라는 오류. 또 다른 하나는 모든 화목한 가정이 동영상 촬영 가능한 스마트폰이나 그에 준하는 전자 기기를 보유하고 있을 만큼 물질적으로 넉넉하리라는 짐작. -215p
이름에 수분을 품고 산다는 것이 미신일까? 이 클리셰의 뿌리인 <인어공주>를 처음 읽었던 80년대부터 수분 그 자체(雲)인 나는 물을 좋아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새해에는 수영을 꼭 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