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모과 <그린레터>
여행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사랑 이야기였지 뭐야!
-221p
사랑해야, 이야기를 들려줘.
네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249p
인간이 안전과 안정, 보존을 위해 당연하게 선택해 왔다는 일들조차 실은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전제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겸허해지는 사실을 SF가 알려 주었다. -265p, 작가의 말
지난 6월에 다녀온 도서전에서 북토크와 함께 일찌감치 업어온 <그린 레터>를 이제야 완독한다. 어떤 책은 더 좋은 컨디션으로 읽기 위해 미루고 미루다 마침내 최적의 시기를 틈타 다가오는데 이 책이 딱 그렇다. 작년에 읽었던 <나의 눈부신 친구>와 나폴리 4부작으로 완성되는 내 최애 장편 소설 코너에 모시고 싶은 책. 재독한 인생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함께, 방랑 소설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도 준비해봐야겠다.
앞서 읽은 황모과 작가의 <밤의 얼굴들>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한다. 방랑 소설이 취향인 만큼 최근에 읽은 인상적인 작품들에도 외국인 또는 재외국민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올해는 체력의 문제로 거의 단편 소설을 읽고 있지만 <그린 레터>를 통해 다시 한번 각성한다. 아, 맞다 나 장편 좋아하지. 상반기에 <밤의 얼굴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박민정 작가의 <바비의 분위기>와 <백년해로외전>을 선정했다. 지역과 시대는 다르지만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도 연관 키워드가 포함된다. 특히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경우 이 책 <그린 레터>와도 많이 닮아있다.
연관 추천작 위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게, 작품 내부에는 반전이 많다. 그 여정을 따라가며 등장인물과 등장식물의 애틋함과 억울함을 오롯이 자기만의 감각으로 경험해야 한다. 방해하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사랑과 생이별을 암시하기 때문에 두 번째 파트로 넘어가는 동안 심리적 허들이 있었다. 이것도 완독이 늦어진 이유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돌아와 보니 더 성장한 뒤에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말에는 ‘춤이라는 언어’에 관한 언급도 있다. 비티스디아가 구사하는 언어는 춤을 추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섬세한 표현과 닮아 있다. 춤에는 그림이나 글, 심지어 물리학과 해부학을 동원한다해도 설명하기 모호한 구석이 있다. 이륀의 과학자다운 집념을 닮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언어의 정교함 그 자체를 넘어서 언어 체계를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걸 가능하게 하는 탁월한 SF적 사고력에 공명할 수 있는 작품이다.
모험을 꿈꾸며 비로소 당신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모험의 끝에 당신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설렜습니다. 당신이 꿈꿨던 모험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43p
얼음산국에서 쿠진은 악의 축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출신을 두고, 피의 농도 따위를 두고 사람의 순도를 판정했다. -81p
길을 나선 자들만 만날 수 있는 떨림이었다. 잠시 들른 곳에 줄곧 머문다면 그건 더 이상 여행이 아니다. 어떤 여행은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완료된다. 간절히 귀환을 원했지만 새로운 길을 택했던 로밀야의 모험과도 닮아 있었다. -159p
그들은 최저임금의 절반만 주면서도 저를 모욕할 수 있는 처지였고, 저는 무례한 사람을 쫓아낼 수 없는 처지였지요. -197p
‘진짜인지 어디 한번 보자’며 팔짱을 끼고 의심하는 사람, 아무런 개입 없이 식물이 자신 앞에서 놀라운 일을 펼쳐 주길 바라는 사람 앞에서 비티스디아는 싹을 틔우지 않았다. -235p
이 식물은 떠나는 자들, 멀리 가는 인간들을 골라 반려로 삼은 것이다. -247p
군더더기 없는 문장 속 뼈 때리는 사회 분석은 덤이 아니고 보물이다. 너무 사랑하는 문장들은 자칫 스포일러일 수 있(고 나만 알고 싶)기에 아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