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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26. 2024

파묘의 여운과 아쉬움이 있던 없던

황모과 <밤의 얼굴들>

無緣之靈, 바꿔 말하자면 무연고자의 위령. -12p


"흥, 일본 귀신은 무섭나 보군?"

"아뇨. 제가 일본어를 못해서요.

한국 귀신이라면 말은 통할 거 아니에요. 그렇죠?"

-15p


"도굴꾼이었어?"

"도와주실 거 아니면 조용히 계실래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든요."

-17p, 연고, 늦게라도 만납시다




'무덤은 내 삶의 터전이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을 읽었다. 삼일절이었고, 전날인 윤일에 문제작 <파묘>를 보고 그 여운을 달래려고(?) 꺼낸 책이다. 황모과의 <밤의 얼굴들>이었다. 무연지령 또는 이름 없는 묘, 일본 귀신, 도굴꾼이라니!


빨리 이 책을 역주행시키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리뷰 계획은 자꾸 방해를 받았다. 인스타 활동 정지, 불면증 또는 심야 카페인 중독(?)과 싫어증, 충동적인 새학기 메뉴 개편(?)과 랜덤 병행독서로의 회피. 리뷰를 쓰려고 책과 독서대와 키보드를 들고 다닌지 벌써 며칠째인지. 리뷰를 위해 주요 포인트만 다시 읽어봐도 '연고'는 소름돋게 시대를 앞서갔고(!) 이책의 대표작인 '모멘트 아케이드'는 소름돋게 소설의 재미와 스릴에 충실했다.




도시괴담이라는 개념이 한국에 자리잡기 전부터 존재한 상록괴담에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던 2002년의 어느 날을 또한번 소환한 '니시와세다역 B' <기묘한 이야기> 한국버전이라  수도 있는 정보라 작가의 <한밤의 시간표> 오버랩된다.


상록괴담이라 작명한 문제의 썰은 1904 농업전문학교로 개교한 120 전통의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상록캠퍼스(2003 관악으로 통합)에서 밤산책을 하던 어느   선배에게 들었던 일제강점기 배경의 괴랄한 민담이다.


상록괴담의 골격은 니시와세다역 B층과 거의 비슷한데 상록캠퍼스에 농대 뿐아니라 수의대도 있었고  지역이 식민지의 총독부가 있었던 경성과 가까우면서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위성도시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간 추리하지 않아도 육감이 반응한다. 가능성만으로 끔찍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이므로 책을 읽고 직접(?) 간접경험하기를 권한다. 속박이나 신체훼손에 트라우마가 있다면 읽기 전에 숙고할 것을 미리 경고한다. 나는 둘 다 있지만 관련 괴담을 처음 들었을 때는 둘 중 하나만 있었고, 중간에 <한밤의 시간표>라는 덜 괴로운(?) 징검다리가 있었기에 상처와 분노를 보듬고 더 괴로운 역사를 직면할 수 있었다.




내겐 타인의 언어를 공감하는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언어와 달리 감각으로 느껴지는 통증은 눈물을 쏙 빼고 말았다. 즉각 울분이 치솟았고 욕설이 목까지 차올랐다. '통감'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뼈에 사무치는 고통. 제 몸으로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각은 사람을 사무치게 한다. -71p, 당신의 기억은 유령


일왕에게 충성하며 패전 후에도 밀림을 지키던 군인이 있었다. 30 가까이 필리핀 정글에서 홀로 무기를 갈고 닦으며 살았던 그는 전쟁이 끝났다는 전언을 믿지 않았다.  군인 같은 사람 아니냐고?

-122p, 니시와세다역 B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찾아다니던 모멘트가 바로 당신의  순간이었다는 것을요.

-173p, 모멘트 아케이드




다른 이의 마음을  몸처럼 느끼는 , 사라져간 사람들을 되살려내는 ,  불가능한 일을 그래도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추천사(김겨울)



역사와 SF 만나는 곳에서 실험해보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무한한 반성 혹은 애도의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반복되지 않아야  미래에 대한 무한한 탐구와 설계를 제공한다.  시점에서 황모과 작가가 취했던 요소들과  '취함' 탁월함에 깊은 감동과 진한 여운을 느꼈다.


쓰다보니 <파묘>는 뒷전이 됐다. <파묘>가 좋았거나 실망스러웠다면 <밤의 얼굴들>을 읽고 황모과 작가에게 입덕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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