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멜라 외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숭고하고 높은 자리. 비밀스러운 욕망. 흘려듣는 척했지만, 할멈이 그렇게 은밀히 속삭일 때면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속물처럼 보일까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한 나의 속내를 할멈은 죄다 알아챘다.
-266p, 혼모노(성해나)
문수가 대결하려는 대상이 신애기도, 장수 할멈도, 굿판에 모인 사람들도 아닌, 현존하는 자신을 가로막고 침묵하는 불합리하고도 불명확한 세계일 때, 그는 오히려 가벼워진다. -293p,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성현아)
순응했으나 판에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기성세대(를 집약한 인물) '문수'와 새 판을 주도하는 신애기의 대결은 이미 승부가 정해졌다. '혼모노'가 보여주는 문수의 마지막 반항 또한 반항으로 완성하는 완전한 순응이자 정신승리로 포장된 완패일까. 배경과 서사의 강렬함으로 시선이 쏠리지만 전년도 대상 수상자인 이미상의 (수상작이 아닌) 소설 속 아빠-딸의 순조롭지 않은 세대교체와 진정성 논란 장면이 생각나기도 한다.
한편 '곽'은 저 깊은 곳에 역사로 남겨진 반항심을 지금 여기에서 성실한 마음으로 깨워보지만, 반항을 살짝 곁들인 순응과 패배한 줄도 모르는 무구한 완패를 이루며 '퇴근'한다. 지난 세기의 반항아들은 교무실이 아닌 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고 (역시 이미상이 다룬 적 있다.) 그 세대의 열기를 포기 못 한 채 타락한 농담을 같은 톤으로 발설하는 속물들. 그 패턴조차 어리둥절한 교양주의자 '곽'은 웃프게 다가오는 시대의 단면. 그럼에도 곽의 내적 투쟁에 마음을 졸이게 된다.
유서 깊은 출판사가 기획하고 석학들이 감수한 지식교양총서와 세계문학전집. 하나하나는 알맞게 배치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조화롭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었다.
-139p, 보편 교양(김기태)
'보편 교양'은 학업 성취에 있어 개인의 문화 자본, 사회 자본, 경제 자본이 각각 긴장하고 갈등하거나 때로 긴밀하게 공모하는 양상을 한 교사의 시선을 통해 드러낸다. -적을 기다리며(박서양), <계간지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성해나의 소설집을 구하려다 눈 맞은 다른 책들에 시달리는 와중에 김기태의 소설집이 나왔다. 지금부터 정주행할 작가들도 많은데 전년도 수상작가들을 역주행 할(/시킬)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의 두 눈에 야만성을 담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이 배반하길 바랐다.
-309p, 언캐니 밸리(전지영)
죽은 사람은 항상 있었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쥐(전지영), <2023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대신, 할 수 없었다고 믿어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전지영), <2023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90p,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공현진)
현실을 쪼갤 수 없는 자, 하나의 현실을 지닌 자에게 고독은 필연적이다. -108p, 그러므로 갈 수 있는 만큼 가보려 합니다(이소)
아무 곳이나 가리켜도 자기가 가리키는 곳이 곧 정확한 방향이 된다고 믿는 태도가 방향을 결정했다.
-녹(공현진), <2023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심지어 신인 등장이다. 데뷔작부터 존재감 강렬했던 전지영과 공현진은 말 많아질 작품들과 함께 '젊은작가상'의 젊음을 담당했다. 그들의 첫 소설집을 기다린다.
할머니는 내가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면 오미자물을 주면서 달랬다. 다 울어버리지 말고 울고 싶은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울고 싶은 자신을 바라보라고 했다. -31p, 이응 이응(김멜라)
'기억'이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 중 하나인 이상, 우리는 언제라도 또다시 슬펴질 것이고, 그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애도를 수행해야 한다.
-69p, 몸짓의 진화(전승민)
죽어서도 죽지 않는 감정이 있다면 노래가 끝나도 혀끝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다면 누군가의 꿈에 찾아가 어떤 말을 해야 한다면.
-제 꿈 꾸세요(김멜라), <제 꿈 꾸세요>
김멜라의 소설집을 미리 준비해 둔 덕분에 '이응 이응'을 읽고 2021년 이후 김멜라의 역대 젊작 수상작들과 '제 꿈 꾸세요'를 거쳐 전승민 평론가의 '이응 이응' 해설로 돌아왔다.
(김멜라 소설집 리뷰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