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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01. 2024

겨울에도 봄에도 아련한 산책소설

고요한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죄의식과 상처를 남기며 쉽게 작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른 이별을 파생시키거나 방황하게 만들지만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앞에 이르면 우리는 봄밤에 만개한 벚꽃의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추천의 말(은희경)




십년 전 서대문구의 반대쪽 끝자락에 살면서 강남과 홍대로 통근했었다. 내가 살던 곳은 현재 재개발이 진행중인 산자락이지만 그때 처음으로 도심 근처에 살면서 사대문 안이 참 좁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 어렸던 80년대부터 서린동에 있는 공안과에 다녔고 곧 교보문고와 KFC라는 상호에 익숙해졌지만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 종각 사이가 엄청 멀게 느껴졌다. 다리가 짧았다. 전철이 다니지 않는 곳은 버스나 택시를 타야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환승통로에서 정규직으로 보이는 직장인들과 어깨싸움을 하느니, 지상으로 뾰로롱 솟아서 청계천을 따라 걷거나 나만의 속도로 파워워킹을 한다.


지하철 3, 4호선이 막 개통됐을 때부터 다녔고, 내가 태어난 병원이 있는 곳이 광화문과 그 주변이다. 광화문역은 그 후에 개통됐다. 지금은 어느 역부터 어느 역 사이가 도보로 몇 분인지도 안다.


얼마 전에 마주친 (지하철이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께서는 을지로입구역에서 3호선을 찾으셨는데, 하마터면 그 추운 날 걸어가시라고 할 뻔. (지하보도도 있지만 그 생각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모범답안은 을지로 3가역에서 환승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의 화자는 이 근방을 자기 집처럼 환히 들여다보며, 첫차를 기다리는 마리에게 벚꽃 휘날리는 밤산책을 선물한다. 담담하고 종종 무미할만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풍경스케치와 회상 속에 충격적인 죄책감과 풀리지 못한 애도, 끝나지 못한 사랑이 배어나와 내내 가슴을 졸였다.


맥도날드 투어와 심야산책도 쓸쓸하지만 꽃 피는 봄날에 꽃을 피워야 할 청춘들이 날마다 죽음을 마주해야 밥값을 하는 이야기. 하늘을 나는 물고기처럼 비현실적이지만 장례식장이 '일터'인 것만 제외하면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있을 법한,을 넘어서 있었던 일의 재구성으로 다가온다. 봄날의 이별, 그 후 십년 동안 내 삶을 채워버린 죽음들, 표지 일러스트를 비롯해 작품 속에 수없이 등장하고 스포일러도 아닌데 가장 최근의 부고와 관련이 깊어서 발음할 수 없는 단어. 금기어가 된 그 말.


재호와 마리는 정규직이 되면,이라는 가정법을 반복하며 여행계획을 자꾸 미룬다. 그렇게 미루다 정말 못 간다,하고 싶지만 왠지 이들도 내년쯤엔 고베라도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정규직 되면 휴가 때마다 한 곳씩 보러 가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은 쉬지 않고 알바를 해야겠지. -20p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봄날에 떠났어. 할아버지도 그랬고 할머니도 그랬고. 그래서 난 봄날이면 죽음이 떠올라. -39p


택시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사라진 자리에 어둠이 머리를 들고 나와 거리를 걸어 다녔다. 어둠을 향해 액셀을 당겼다. 뭉텅뭉텅한 어둠이 사방으로 터지면서 흩어졌다. -71p


불을 환하게 밝힌 맥도날드가 골목 양쪽에 붙어 있는 것 같았는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자 가슴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무리에 섞여 있고 싶었다. -78p


​상주는 부고 전화 돌리기에 바쁘고 장례 절차가 마무리됐다 싶으면 조문객을 받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는 게 장례식장 풍경이었다. -110p


지상에 머무는 3일 동안 산 자들의 절을 받는다. 그 사이 창밖에서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벚꽃 향기에 영정 사진 속의 죽은 이는 쓸쓸해진다.

-122p


하지만 나는 홍난파의 집에 가지 않고 다음 날도 맥도날드에 갔다.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과 같이 한 식탁에 앉아 햄버거를 먹는 가족 같았다. -180p




​더운 날 돌아가신 외할머니 기일에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해가 지지 않아 열사병으로 쓰러질 뻔했는데 동짓달에 이별한 친구들은 밤새 읽고 쓰는 내 곁에서 생각을 보탠다. 그래서 밤이 가장 길고, 조금은 덜 슬픈 크리스마스에 이 책을 읽기로 했다.


 

(2023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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