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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Dec 03. 2023

긴급상황

단편소설 <24시 카페 라이언>

이 여행은 연정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자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으려던 프로젝트였다. 고용에 지장이 생길까봐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내내 기밀에 부쳤는데, 마침 항공권 이벤트를 하길래 덜컥 예매를 해버렸다. 예매한지 이미 3개월이 지났지만 출발일 2주 전에만 사장에게 통보하면 되니까 이제껏 함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희는 원래 이렇게 즉흥적이었나?


"그래, 같이 가자."

"언제 출발하는데?"

"다음달 초, 9월 8일."


백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때만 해도 그는 창업준비생이었다. 창업하면 여행을 꿈꿀 기회가 사라지겠다는 찰나의 생각은 0.1초만에 나도 가겠다는 말이 되었다. 가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준비는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동안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연정은 동행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 알바를 하려고 했던 3개월 동안 이미 백희에게 잔뜩 빠져있었고, 백희와 함께 일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동료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둘에게 몽글몽글한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연정은 있는 힘껏 자신을 통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은 위험한 평형상태가 지속됐다. 긴급상황이 아니면 괜찮지만 긴급상황에서는 분명 뒤집힐 수 있는 일시적인 평화. 연정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뉴욕여행은 확실히 긴급상황이다.




백희는 창업하면 연정을 데려가고 싶었다. 그냥 스카웃하면 자신을 키워준 사장을 배신하는 모양이라 고민에 빠졌다. 연정에게 일적으로 인간적으로 반했지만 그녀와 오래 일하고 싶은 마음은 백희도 마찬가지였다.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가 능숙하게 업무를 하면서도 바리스타를 계속 하는 것에 만족하기 바라고, 백희 자신에게 질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뉴욕에 간다고?


처음에는 간다는 동사가 더 충격적이라 목적지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가고 싶다는 생각에 앞서 가겠다는 대답을 해버리고 연정의 대답이 돌아오는 3초 동안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연정과 함께라면 더한 곳도 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정이 원한다면 거리를 둘 것이다. 그러나 연정은 늘 백희를 원했다. 그걸 이용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매일매일 해야할 정도로 백희를 갈망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니, 그건 그냥 흘렀다.


연정은 순간에 충실했고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그 이상을 말했고, 백희는 그저 때를 기다렸다. 너를 따라가겠다는 말을 오글거리지 않게 하게 될 이 순간을 기다렸다.


"나 티켓 검색할동안 네가 가게 봐라."

"티켓 내가 검색해줄게. 난 1년 동안 그것만 했어."

"그래. 내 티켓 꼭 찾아내. 같은 비행기 아니어도 되니까 비슷한 날짜로."

"같은 비행기로 할거야. 두 장 예매하고 내 티켓 환불하면 돼."


연정은 백희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빈말이라고 해도 티켓을 결제하는 순간 폭로가 될테니 괜한 희망고문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바로 티켓찾기에 돌입했다. 당일이 되어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새로 예매할 생각이었다. 연정을 보내놓고 따라오지 않거나, 먼저 출발한 뒤 증발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네.




출발을 일주일 미루고, 여행 기간은 삼주로 늘렸다. 카페 라이언에서는 선배인 백희가 사장에게 바로 통보했다. 둘이 같이 가서 같이 복귀할테니 그동안 대타를 구하시라고. 사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흔쾌히 수락했다. 같은 시간 알바생 두 명이 동시에 그만두면 가게가 마비되긴 하지만 백희와 연정은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3주 전에 연락해서 3주 간의 부재를 이미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 정도면 본점 매니저인 사장의 조카와 사장 본인이 출근해도 충분한 조건이다. 사장은 여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특정 매장에 상주하지 않지만, 긴급상황이 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번 부재는 확실히 긴급상황이다.




서른 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다섯 시간 이상의 비행을 해본 건 둘다 처음이었다. 백희는 아시아를 벗어난 적이 없고 연정은 한중일을 벗어난 적이 없다. 기내식을 먹고 각자 영화 한편씩 봤지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한국시각 밤 12시, 백희와 연정의 퇴근시간. 둘다 눈에서 빛이 났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데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난동을 피울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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