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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Dec 17. 2023

뉴욕의 아침

단편소설 <24시 카페 라이언>

연정이 탕비실에서 커피와 컵라면을 가져왔다. 그녀는 무인도에서도 가장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본능의 소유자였다. 백희는 볼때마다 감탄했다. 그녀를 스카웃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녀와 같이 살아야 했다. 스스로 생기와 활력을 충전하는 것이 벅찬 백희에게 연정은 존재 자체로 등불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 메두사는 예전부터 백희를 제물로 원하고 있었다. 백희는 각오하고 있었다.


"커피 안마셔도 우리는 어차피 못 자."

"연정이 네가 주는 건 다 먹을거야."


백희는 고공비행에 취해 있었다. 연정의 메두사가 반짝, 하고 레이저를 빛내다가 연정의 함박웃음에 갇혀서 퇴각했다. 연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백희를 안고 싶었지만 지금은 비행 자체를 즐겨야 했다. 앞으로 수십, 수백번을 더 비행할텐데 비행기와 백희가 동의어가 되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별이 예정된 사랑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사랑조차 예정에 없는 시점이 아닌가.




맨해튼 시내에 도착하니 동부표준시로 밤 10시가 넘었다. 피자 한 조각씩 먹고 콩알만한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연정은 트윈룸을 예약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었고, 백희는 알겠다고만 했다. 실제로는 콩알만한 2인실에 콩알만한 싱글 침대가 20 센티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연정은 입실 후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두 침대 사이의 협탁을 빼고 침대를 붙여버렸다. 백희는 폭소를 참으며 돌아서서 웃었다. 웃는 것을 걸리면 쫒겨날지도 모르니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욕실로 피신했다.


"백희야."

"왜?"

"물 덥혀놓고 있어. 금방 갈께."

"뭐? 너 먼저 씻으려고?"

"당연하지. 너 급해?"

"급한 건 아닌데. 내가 빠르잖아."

"네가 빠르다고 누가 그래?"

"그냥 그럴거 같아서."


백희의 논리가 허공을 헤매고 있을 때 속옷 차림의 연정이 욕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백희를 신속하게 벗기고 자신도 마저 벗었다.


"같이 씻고 빨리 자야지."


백희는 말문이 막혔다. 착륙 2시간째, 여행 도파민이 최고점을 유지하고 있는데 일 년 동안 그림처럼 눈으로만 더듬었던 연정이 지척에서 벗고 있었다. 이제 메두사는 그녀를 완전히 장악했다. 연정은 가벼운 화장을 클렌징티슈 한 장으로 말끔히 지워내고 빠르게 머리를 감았다. 그동안 백희는 애써 거울을 보며 이를 닦았다. 거품을 헹군 연정이 머리를 묶어 올리고 백희를 샤워부스로 끌어당겼다. 연정은 아기를 씻기듯이 백희의 몸 구석구석에 바디클렌저를 문질렀고 백희도 연정을 따라 그녀의 등과 팔다리를 문질렀다. 백희가 마지막까지 가슴을 남겨두고 연정의 배만 계속 문지르고 있는데 연정이 배시시 웃더니 갑자기 샤워기를 틀었다.




여행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도착한 날 잠을 설친다는 것 정도는 스스로 알았다. 오래 기다리다 거의 체념해버린 백희를 꿈의 여행지였던 맨해튼 한복판에서 품었다는 뿌듯함은 연정을 과각성 상태로 몰아갔지만 백희는 차분하게 그녀를 만족시켰고 그녀가 식기 전에 백희도 만족을 얻었다. 다시 뜨거운 물로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둘은 깊은 잠에 빠졌다.


연정이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어두웠지만 시스루 커튼이 드리워진 창밖으로 어렴풋이 날이 밝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백희는 시체처럼 잠들어있었다. 연정을 눈을 비비고 옷을 챙겨입었다. 잠든 백희 옆에서 조용히 앉아있자니 너무 신나고 바깥세상이 너무 궁금했다. 초가을에 입는 가벼운 바람막이에 지갑만 챙겨서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처음 맞는 뉴욕의 아침이었다.


건물을 나서는 순간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사거리에서 스트리트와 애비뉴 앞에 적힌 숫자와 구글맵의 현재 위치가 일치하는 것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출은 동쪽에서 보는 것이 진리였다. 태평양의 일출도 겨우 한 번 정도만 봤는데, 오자마자 대서양의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연정은 이스트 리버 강변의 벤치에 앉아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벌써 조깅하는 사람들과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저 멀리 잘 익은 홍시같은 태양의 정수리가 보였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아침 6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연정은 타임랩스 촬영모드를 켜고 휴대폰을 벤치에 세워두었다. 태양이 천지를 밝히는 동안 강변의 인구밀도와 강아지밀도가 서서히 늘었다.




혼자 남은 백희는 연정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았다. 이 곳이 뉴욕이라는 것부터 현실감이 없었다. 머리를 지압하면서 커튼을 열었더니 영화 속 장면이 펼쳐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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