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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Dec 18. 2023

뉴욕의 커피

단편소설 <24시 카페 라이언>

 순간 연정이 생각나서  안을 둘러보고 욕실에 다녀왔다. 휴대폰에는 연정이 보낸 카톡이 남아있었다. 현재 시각은 6 35, 카톡에 메시지가 수신된 시각은 5 39분이었다. 일어났고, 천천히 돌아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정말로 천천히 오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연정은 너무 멀리 가지 않기 위해, 강변을 따라 세 블록 정도만 올라갔다가 좌회전을 해서 근처 빵집을 검색했다. 에싸 베이글이 보이길래 빠르게 걸어갔지만 주문 웨이팅이 있었다. 다음 빵집은 숙소 근처라 그 곳에서 크루아상과 머핀을 샀다. 백희는 카페 라이언의 베이글을 좋아했지만 이 빵집에 베이글은 없었다. 빵을 담을 가방이 없어서 커피를 살까말까 망설이다가 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머신이 떠올랐다. 호텔에서 조식이 제공되긴 했지만 7시부터 11시까지라는 메모를 확인하고 방을 나올 때부터 빵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했기에 여권과 지갑을 챙겼던 것이다. 백희에게 커피를 가지러 와달라고 카톡을 보내고 로비에서 만나 함께 돌아왔다.


테이블이 없어 침대 위에서 커피와 빵을 먹으면서 어색하게 눈을 마주쳤다. 빵이 끝나고 커피가 남았지만 연정은 백희의 종이컵을 가져가 구석으로 치워둔 협탁에 내려놓았다. 침대로 돌아오는 그녀는 이미 메두사였다. 백희는 지난 밤의 쾌락은 에피타이저였다는 생각을 했다. 백희가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연정은 그를 가두고 최대한 빠르게 자신을 만족시켰다.




연정이 여유롭게 외출준비를 하도록 배려하는 마음에 그녀를 먼저 샤워부스에서 내보내고 백희는 최대한 천천히 온수샤워를 했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연정을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연정의 여행에 따라온 입장이기도 했고, 여행지에서 사소한 신경전을 하느라 불필요한 추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졌다는 커플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백희야."

"왜?"

"너 무슨 색 입을거야?"


둘만의 여행에 자발적으로 갇혀있는데 커플룩을 거부할 용기가 없었다. 연정이 원하는 건 그런걸까?


"내 옷은 흰색, 초록색밖에 없어."

"그건 나도 알지. 그러니까 무슨색?"

"흰색 입을게. 너는 뭐 입게?"

"그럼 나도 밝은 색 입으려고. 흰색 말고."


연정은 같은 색을 추구하기보다 어울리는 배색에 공들이는 편이다. 백희는 그녀가 그동안 초록색을 입지 않은 이유가 백희 자신의 색감이 싫었던 것이 아님을 갑자기 깨달았다. 연정이 좋아하는 보라색의 스펙트럼에서 특히 상의는 백희의 옷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설마 그래서 그런 거였어? 백희는 자신이 이런 것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의아했다. 그러고보니 연정이 그에게 초록색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함께 삼주동안 여행을 하는 동안 미묘한 취향 차이가 있었지만 백희는 연정이 계획한 일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백희는 하루에 두 곳 이상의 카페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연정은 아침마다 로비에서 커피를 가져왔고 커피를 다 마시기 전에 컵을 압수한 뒤 메두사로 변신했다. 그런 연정에게 적응할수록 호텔 커피의 쓰고 떫은 맛이 보약처럼 느껴졌다. 이제 향긋한 모닝커피는 잊은지 오래다. 그의 잠을 깨우는 것은 메두사였다.


연정은 밤의 쾌락으로 숙면을 취했지만 백희가 아침의 쾌락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자발적으로 커피를 날랐다. 방 안에 전기포트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오랜 기간 알바를 하는 동안 백희의 커피 취향은 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침형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커피 사냥은 로비가 한계였다. 맛있는 커피를 가져다주면 계속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 습관을 고수했다. 대신 귀국하는 날 아침에는 그동안 투어했던 카페 중 백희가 가장 좋아했던 곳까지 다녀왔다. 너무 피곤했지만 배려 가득한 깜짝선물을 꼭 해주고 싶었다.


잠이 덜 깬 백희는 컵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한 대신 향을 맡고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커피가 식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었지만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귀국일이었기 때문에 해가 뜨기 전에 커피 사냥을 다녀온 연정이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고, 평소보다 격하게 그를 깨웠다. 백희는 커피 향으로 잠을 털면서 연정을 꼭 끌어안고 한 모금 삼킬때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키스를 했다. 커피에 진심이 아니었다면 세 모금을 넘기지 못했겠지만 둘다 커피에 환장하는 바리스타여서 이 커피만큼은 끝까지 마셨다.




귀국 후 이틀 뒤에 연정과 백희는 원위치로 복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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