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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Feb 05. 2024

교대근무

단편소설 <24시 카페 라이언>

첫날은 온전히 각자의 하루를 보냈다. 다시 출근하는 둘째 날 아침 연정이 가벼운 짐을 싸서 백희의 집으로 들어왔다. 헤어질 때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고 그 후로는 둘 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진 경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서로를 생각하며 보냈다. 휴식을 방해할까 봐 카톡은 하지 않았다. 연정은 4시간 간격으로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렸고 백희는 그녀의 휴식을 방해할까 봐 새로 올라온 스토리를 열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녀를 마중 나갔을 때, 연정의 짐을 보고 살짝 놀라긴 했으나 백희는 이 놀람이 곧 행복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들이고 방금 내린 커피를 내밀자 그녀는 커피를 받아서 향만 맡고 탁자에 내려두었다.


"나 여기서 좀 살아도 돼?"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연정의 표정에 슬픔이나 불화의 흔적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긴 하지. 너랑 떨어져 있기 싫은?"


백희는 말 대신 키스로 대답했다. 그녀와 합칠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여행 내내 붙어있어서 그녀에게 숙고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귀국하고 돌아오는 전철에서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고, 그녀를 원래 집에 들여보내는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거대한 허무가 백희를 덮쳤다. 백희가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한 가지는 연정이었다. 하긴, 연정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서도 혼자 살아남을 사람이니까.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팬데믹이 잦아들 무렵, 오래 투병 중이던 연정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른 연정은 백희의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본인을 포함한 유족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백희는 연정의 빈자리를 감수했다. 대신 그들이 함께 일했던 시간을 지금은 온전히 서로를 위해 보낼 수 있게 됐다.


연정이 출근하면 백희는 퇴근해서 가능한 한 빨리 잠들고 연정의 퇴근 시간에 그녀를 마중 나와서 함께 산책을 하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데이트를 하거나 백희의 집으로 돌아와 함께 휴식을 취한다. 연정은 백희가 출근하기 전에 버스로 귀가하거나, 카페까지만 함께 걷고 카페 앞에서 전철을 탄다. 한 번은 백희가 출근 한 시간 전 그녀를 데려다주기도 했는데, 이 동선은 너무 비효율적이라 그만두기로 했다. 같은 매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맞교대 근무를 하게 된 이후, 직장동료라는 관계는 과거형이 되었다.


함께 일하거나 함께 여행하는 동안의 스파크가 사라졌다. 연정은 급속도로 커피에 흥미를 잃었다. 게다가 회사원들 출퇴근 시간이 스트레스였다. 단 두 정거장일지라도 지옥철은 지옥철이다. 그녀는 출근할 때마다 대학원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빠졌다.




백희는 연정과 함께하는 동안 팬데믹을 겪고 사업의 꿈을 잠시 잊었다. 카페 매니저로 점장의 업무까지 겸하고 있었고 사장은 백희와 연정이 있는 매장은 둘에게 믿고 맡기다시피 했다. 실제로 단골손님들은 백희가 점장에 준하는 포지션인 것을 알았기에 매니저님 또는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연정은 정직원을 극구 거부했으나 급여는 정직원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받았다. 생활력에 인센티브가 붙었기 때문이다.


맞교대 2개월 차, 연정은 조심스럽게 백희에게만 퇴사 의향을 밝혔다. 백희는 둥지를 떠나는 새의 환영을 보는 듯한 눈으로 멍하게 연정을 바라봤다. 연정은 콘텐츠 대학원으로 복학하고 싶지 않았다. 휴학과 여행과 팬데믹을 거쳐 지리학이나 정치외교학으로 마음이 돌아섰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어쩌면 수능을 다시 보는 편이 빠를지도 몰랐다. 백희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연정은 백희의 휴무일은 온전히 그에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나머지 5일은 스스로에게 집중하겠다는 의미였다.


백희도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해야 했다. 백희는 스스로에게 집중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사람 만나는 게 좋고, 커피가 좋았지만 팬데믹을 겪으면서 늘어난 책임감에 보람이 뒤따르지 않았고 심야 바리스타 업무에 지쳤다. 다시 여행을 가고 싶었다. 이 모든 상황을 멀리서 관찰하고 싶었다. 이제 그동안 의지했던 연정이 둥지를 떠날 것이다.




새해부터 연정은 퇴사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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