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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Feb 06. 2024

설국열차

단편소설 <24시 카페 라이언>

백희는 잔류했다. 후임을 교육해야 했다. 야간 알바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거의 하루종일 매장에 상주했다. 더 이상 커피 향에 설레지 않았다. 어쩌면 커피에 대한 집착을 놓기 위해,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것만 같았다. 쉬는 날에도 오며 가며 인수인계를 확인했지만 연정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함께 다녔다. 연정은 자신의 공백이 가져온 카오스가 점점 불편해졌다. 하지만 백희의 휴무일에는 그를  1분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래야 공부하는  백희를 최소로 생각할  같았다. 아직도 돌아서면 백희 얼굴이 떠오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웃게 했다.


서른을 뉴욕에서 맞지는 못했지만, 마흔은 퇴사자로 맞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연정은 공부 시간을 즐겼다. 백희를 보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공부는 오직 혼자서 몰입하는 시간이다. 타인과 공유하는 도서관이나 카페에서도 공부는 할 수 있지만 옆에 연인이 있으면 방해가 된다. 그러니 공부와 데이트의 절묘한 분배가 성공여부를 가른다고 볼 수 있다. 경험상 실력이 비슷한 학생이나 자신을 이끌어줄 선배 또는 교사를 만나는 건 시너지가 있지만, 백희는 아직 일에 치이는 전 직장동료일 뿐이다. 그에게 시간을 주고 연정은 고독한 세계에서 기다려야 한다. 연정의 공백이 안정되어 그가 다시 연정을 배려할 여유가 생기거나, 그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겨 연정의 페이스메이커가 되기를.




시간이 지날수록 휴무일에는 함께 귀가해서 먹고 자기만을 반복했다. 연정이 없는 카페에 흥미가 떨어진 백희는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을 떠올리지 못했다. 영화는 집에서 보고, 밥도 집에서 먹었다. 연정은 본가 근처의 스터디카페에 적응했다. 공부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침대와 한 몸이 된 백희를 보고 있으면 도서관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입시보다는 실제로 그녀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의 책을 찾아보고, 다양한 책을 둘러보고 싶었다.


연정의 메두사는 다른 것을 원했다. 백희를 만나지 않고 공부만 하는 날에는 잠을 설쳤다. 백희가 휴무일을 앞두고 퇴근할 때는 이미 휴무에 돌입한 연정이 마중 나와서 함께 산책했다. 연정이 퇴사한 후에도 한동안 이 패턴을 이어갔다. 연정이 일하던 시간에 일하고 퇴근하는 백희의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오는 길에 저녁을 포장하거나 가볍게 반주를 하고 식사 후에는 지칠 때까지 사랑을 나누었다. 잠이 부족한 만큼 다른 것도 부족했기 때문에 한두 시간 정도는 열정적인 탐닉을 했고 그러다 백희가 샤워를 하는 동안 연정은 곯아떨어졌다. 일에 지친 백희도 그녀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 어느 틈에 눈을 떠보면 아침이었다.




백희의 무기력이 심해질수록 연정의 학구열은 불타올랐다. 함께 맞는 밤에 기절하듯 숙면을 취했지만 다음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자는 백희를 옆에 두고 책을 읽었다. 백희는 묘한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연정의 허벅지를 파고들면 이번 챕터만 끝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책을 질투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백희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연정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백희가 겨우 그녀의 부재를 받아들였는데 정작 백희도 스스로에 대한 의욕을 상실해서 연정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백희가 없는 세계로 연정이 혼자 나아갈 것만 같았다.


연정이 시험을 보거나 꼭 필요한 자료를 구하러 가야 한다는 이유로 휴무일의 데이트를 취소하는 날이 많아졌다. 백희는 직장에서의 책임과 대우에 불만은 없었지만 방향과 목적은 확실하게 잃었다. 커피 향에 설레던 날들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다. 여행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연정을 데려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괜한 오해를 사는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멈추지 못해 계속 달리는 설국열차 같았다.




연정은 백희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던 약속을 잊어버렸다. 공부 기록을 하는 동안 자료정리와 콘텐츠 제작에 다시 흥미를 느꼈고, 콘텐츠 대학원에 복학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새로운 전공은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 생각해 봐도   같았다. 그녀는 가을에 복학하기로 결심하고 학업에 열중했다. 안면이 있는 교수와 선배들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관계자들과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갔다. 여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이나 전산실에서 보냈다.


마침내 복학을 일주일 앞두고 스스로에게 포상휴가를 줄 겸 가까운 곳으로 1박 2일 여행을 계획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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