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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Feb 06. 2024

잠수이별

단편소설 <24시 카페 라이언>

마지막 데이트는 벌써 두 달 전이었다. 쳇바퀴가 되어버린 백희는 점점 연락하는 빈도가 줄었고, 백희가 연락하지 않는 이상 연정은 백희를 생각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학교 안에 있는 카페 바리스타와 우연히 집에 같이 오는 동안에도 백희를 떠올리지 못했다. 학부생인 그는 연정을 오래 지켜봤다는 듯이 그녀의 새로 산 가방과 새로 한 머리에 대해 언급했다. 연정은 너무 어리고 너무 조각같이 생긴 그에게 설레지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관심만큼은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귀가 후 화장을 지우다 립스틱 보관함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커플링을 발견했다. 언제 이 반지를 빼 두었는지, 낀 적이 있기나 한 건지 까마득했다.




백희는 더 이상 연정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잘 지내냐고 물으면 정말로 남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 만나자고 조를 수도 없으니 매번 연락을 미루고 미루다 휴무일을 앞두고 떠밀리듯 문자를 보냈다.


-내일도 바빠?


연정은 평일 저녁에 일정이 없으면 혼자 쉬고 싶었고, 주말에는 가족과의 시간도 필요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백희와 스케줄을 의논하는 것이 갑자기 버겁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위한 여행인데 백희의 무기력을 배려하다가 끝날 것 같았다. 숙소는 퀸 룸으로 구했고 교통편은 1인 왕복 티켓만 준비했다.


백희의 휴무일이 바뀐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선택한 여행 날짜는 그날이 아니었다. 백희가 묻지 않는 이상 보고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그는 연정의 출장이나 약속에 대해 감시하는 듯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 자신과 멀어져 가는 일정과 관계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마다 이미 그가 들어앉은 구멍에서도 더 깊은 곳으로 물러나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자신감 넘치던 선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백희가 여전히 다른 직원들과 손님들에게는 그만의 아우라를 뽐낼 거라고 억지로 믿었다. 다만 그 이상의 열정과 사랑으로 충만했던 시간이 거두어졌을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빛이 나지 않는 백희를 상상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연정이 알아차릴 수 있는 그의 흔적은 너무도 흐릿했다. 연정은 백희를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져서 고개를 저으며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책을 펼쳤다. 그렇게라도 떨쳐내려는 듯이.




속초에 도착하자마자 근무 중인 백희에게 전화가 왔다. 연정은 말없이 혼자만의 여행을 준비하고 실행시켰다는 것을 설명하느라 현재의 행복을 반감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전화가 오고 있다는 것, 혹은 시간이 지나 전화가 왔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지수는 크게 내려앉아 있었다. 전화를 받으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급격하게 우울해질 것이다. 안 받아도 큰 차이는 없겠지만 망설이는 동안 전화벨이 멈췄다.


백희가 어느 시점에 인스타그램 앱을 지웠다는 것을 연정도 알고 있었다. 백희는 연정에게 전화가 걸리지 않으니 인스타 재설치를 고민하다 업무로 돌아왔다. 그렇게 집착할 의욕조차 없었다. 연정은 전화를 안 받았다는 미안함에 여행 사진을 올리는 것은 참기로 했다. 남을 통해 듣거나 휴대폰을 줄기차게 사용했다는 증거를 확인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날 이후 백희도 연락하기를 포기했다. 연정이 전화가 온 것을 늦게 알았거나 끝내 몰랐다고 해도 언젠가는 연락을 하는 것이 도리였다. 연정은 매듭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개강을 앞두고 감정의 동요를 겪고 싶지 않았다. 처음 계획했던 3개월 알바가 5년이 됐고, 그중의 4년을 백희와 사랑하며 보냈지만 이제야 겨우 자신의 궤도에 돌아왔다. 열정으로 빛나던 백희와 공존할 수 없다면 그를 끊어내야 했다. 백희는 창업 의욕이 소멸됨과 동시에 연정을 붙잡을 명분이 사라졌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자신이 자신을 믿지 못하면서 그녀에게 믿어달라고 할 수 없었다. 백희는 혼자만의 여행을 위해 퇴사를 결심했다.




개강 3주 후, 연정이 카페 라이언에 왔을 때 백희는 없었다. 연정을 모르지만 백희를 아는 직원들은 갑자기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만 했다. 연정은 초면의 바리스타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테이크아웃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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