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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16. 2024

큰사랑

단편소설 <나머지정리>

큰 사랑은 아끼다 망하고 작은 사랑은 아끼지 않다가 망한다. 대부분의 사건이 대과거로 밀려나 있는 지금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연수의 작품을 볼 때마다 표고의 심장은 한 뼘 높은 곳에서 뛰었다. 설레거나 박동이 빨라지는 것과는 달랐다.


연수의 얼굴을 직접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얼굴의 문제는 아니겠지. 뒷모습만 봐도 충분하다. 그가 그라는 시그니처는 그리 어렵게 알아내지 않아도 뻔하다. 그는 뻔한 남자인 한편, 전형적인 남자와 거리가 멀다. 표고의 문제는 그것이었다. 전형적인 남자와 거리가 먼 남자가 뻔한 남자로 행세할 때, 그 사람의 숨은 재능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그 사람을 어떻게든 예뻐해주려고 한다. 그건 꽤나 이기적인 마음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예뻐하다보면 예쁨을 받는 사람도 더 예뻐지지만 가장 예뻐지는 사람은 예뻐하는 자, 바로 나 자신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동력이기 전까지, 누군가를 예뻐하는 마음이 동력이었다. 그리움이라는 동력을 주동력으로 사용하려면 기름칠하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심장이 조이듯 아프다. 그리하여 대신 예뻐할 사람을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그 대상화될 대상으로 연수만한 대상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제발 꺾어달라는 눈빛으로 거의 비슷한 고만고만한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 하면서도 항상 쓸쓸해보이는 그 사람. 하지만 표고는 늘 참는다.


"바닥에 떨어진 거 주워먹는 거 아냐."


연수가 그나마 괜찮은 여자들을 만나기 전, 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표고와 연수의 은밀한 대화를 은밀하게 전달받은 표고의 친언니가 아닌 친한 언니들은 자기가 아는 모든 욕의 150% 이상을 동원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엇이 표고의 귀를 멀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연수의 농담은 고소를 하고 망신을 줘도 부족했다. 어디까지나 인간 대 인간의 대화라고 해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표고 자신이 믿고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언니들이 알고 있는 연수의 이미지가 이 상황을 코믹하게 받아들일거라는 기대와 다르게, 표고를 통해 전해들은 대화를 그 선입견에 조합하면 그야말로 쓰레기가 쓰레기한 상황이었다.


표고는 연수에게만 차라리 솔직했던, 여자 버전의 연수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약간의 허세를 얹어서 연수의 지나친 솔직함을 유도했다는 말 못할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연수의 방심한 모습을 전달하지 않게 됐다. 나를 믿고 보여준 모습을 그의 약점으로 삼은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어쨌거나 주워 먹는 이야기가 나온 시점으로 보아 그에게 끌리기 시작한 것은 강산이 바뀌기 전이다.


​강산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끌린다는 것은 이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증거다. 이 또한 표고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 일이 끝난 일이라면 그냥 에휴, 하는 그냥 잊고만 싶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정말 싫어졌거나, 질렸거나, 서운한 경우를 제외해도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그리 설렘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감정은 타고나는 것인지 훈련받는 것인지 모르겠다. 흔히 '남자들'의 속성으로 알려진 메커니즘을 그녀는 자발적으로 체화했다. 그렇다. 영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 유효기간 바깥에서 설렘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그리고 영신은 제 몫을 다했다.


연수를 통해 영신을 만나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교집합은 머나먼 황무지에 버려진 깃발처럼 이제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표고에게는 어떤 날들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아프다. 연수를 생각해도 아프고, 연수에게 특별함을 부여하지 않으려고 해도 아프다. 연수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하면 머리가 아프고, 연수와 충동적인 사랑을 나누는 상상을 하면 몸이 아프다. 그 어느 쪽도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상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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