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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Dec 10. 2023

돌보는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결국 모두가 외로워진다

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인생의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결코 깔끔하게 매듭지어지지 않고 생애 전반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친다. -192p, 문을 열며




거듭되는 고립과 상실을 겪으면서 거의 떠밀리듯 읽고 쓰는 삶으로 다시 한번 고립되어 상실을 되새기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떤 이야기를 읽고 쓸 것인지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는 동안 머나먼 과거로부터 늘 함께해온 듯한 가치와 방향들은 마치 나침반처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고 그렇게 도달한 중앙역이 어쩌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와는 스무 살부터 ​삼 년 동안 거의 모든 주요 이벤트를 함께 했고, 내가 살기 위해 일시정지를 했던 동안에도 각자의 사정에 의해 꼭 붙어있었다.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미묘하고 날카로운 언어들마저 경험으로, 육감으로, 이성으로 마찰없이 교환할 수 있는 사람. 동지애에 우정까지 보태도 반의 반도 설명할 수 없는 친구였지만 각자의 삶의 궤적에서 너무도 느슨하게 스치기만 했고 (그럼에도 드문드문 많은 양의 정보를 업데이트했고) 다시 7년만에 재회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읽고 써 온 이야기는 아주 다르지만 나는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들켰고, 그간 존경해 온 리베카 솔닛이 아닌 바로 신성아가 내 친구라는 사실에 형언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경험적 아픔에 마음을 내어주는 것을 넘어 차갑게 파고든 심연까지 이렇게 쓸 수 있던 '열정과 지성'에 감복한 것은 물론이고 오늘 갑자기 좋아하게 된 작가라 해도 충분히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말끔함'.


저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생략할  없는 주제와 맥락의 책이지만 그녀의 주장에  하나의 반대를 하자면, 이보다  말끔할  있는 문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련한 소설가나 하품나오는 이론서 작가는 물론이고 논픽션의 상아탑이라고   있는 윈덤캠벨문학상의 수상작가들도 이렇게 보편에 가까운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경이롭다.




​이토록 순정한 사랑의 표현이 또 있을까. 당신이 나를 바라봤으면 좋겠고, 나도 당신을 보고 싶다는 직설적인 요구는 값비싼 선물도, 달콤한 언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50p, 타고난다는 오해


​노동이라고 하자면 이 일은 착취의 강도가 너무 심하고, 노동자의 소외는 정점에 이른다. 이보다 악질적인 노동조건도 없을 것이다. -76p, 돈 버는 여성


아무도 나를 두고 '엄마는 우리 가족을 위해 돈 버느라 많이 바빠'라든가 '엄마에게 중요한 시기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자'라고 아이에게 변호해주지 않았다. -86p, 돈 버는 여성


그들은 돌봄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끝내 모른다. 이 키치적 돌봄은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라는 키치의 특성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100p, 가족 내 정치


보편복지를 포기한 국가의 무신경한 정책 집행은 이렇게 여성을 편 가른다. 돌봄이 얼마나 힘든지 구구절절 증명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누가 더 고생인지 입증하려고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나는 돌봄지옥을 체감했다. -106, 가족 내 정치


고통을 받는 이가 몇 살인지, 경제활동을 하는지, 우리 사회에 이바지할 특별한 능력은 있는지 등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돌봄을 받을 가치를 주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돌보는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결국 모두가 외로워진다.

-131p, 눈에 보이는 구원


그 시간을 견디며 얼마나 많은 상처가 이 아이들의 마음에 남게 될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별들이 일제히 빛을 잃는 광경을 지켜만 봐야 하는 심정이다.

-159p, 의학의 태도


근대적 이분법이 완벽히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철학이 설 자리가 없고, 정치가 작동할 기회가 없다.

돌봄, 의료공백, 고가 신약 급여 등재, 건강보험 재정위기, 존엄사, 연명의료, 호스피스 등 수많은 난제가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187p, 의학의 태도




정희진 선생님의 '왜'가 과찬이 아님을 알게 된 이상, 그보다 더 구구절절한 예찬은 불필요한 것 같다. 더불어 이 책이 앳 시리즈라는 영예를 이어받은 것도, 출판사에서 '저자' 덕분이라고 말해준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우리의 사랑과 의리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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