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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10. 2022

결혼은 세 번쯤 하는 게 좋아

소설이 환기하는 뉴욕여행의 쓴 맛

말이 궁색해질 때마다 장은 버릇처럼 여긴 뉴욕이니까, 하고 말했다. 서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뉴욕에서는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이 말에는 긍정과 도전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와 반대인 경우에도 이 말을 썼다. 여긴 뉴욕이니까 안 돼. 여긴 뉴욕이니까 못 해. 여긴 뉴욕이라 도저히 할 수 없어. 뭔가를 포기하는 경우에도 이 말을 썼다.  -108p


외로운 도시, 뉴욕에서 두 번째 실패를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스스로를 내던진 남자가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그 밤의 영혼들, 고독한 영혼들의 밀도가 느껴진다.


<결혼은 세 번쯤 하는 게 좋아>에 등장하는 장과 마거릿의 주변 인물들은 비교적 단순하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내 마음 나도 몰라'의 상황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둘의 심리전과 다른 인물들의 존재 자체가 방해요소인 이 짧은 이야기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피곤했던지 마거릿은 이내 잠이 들었다. 장은 침대에 기대 마거릿을 바라보았다. 마거릿의얼굴 위로 데이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데이지의 얼굴을 지워내자 다시 마거릿의 얼굴이 떠올랐다.  -143p


장을 점점 궁지로 몰아가는 것은 처음부터 그가 감안했어야만 했던 타자성이다. 나는 종종 아시안 여성이 서구사회에서 느끼는 해방감을 아시안 남성은 전혀 다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한국 사회가 강요하는 성역할에 대해서 적대가 아닌 연대를 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해외에서 달라지는 처지도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첫 여행의 크라이슬러 빌딩(2016)


나에게도 데이지와 줄리아가 있었다. 어쩌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책이나 드라마로 배운 뉴욕은 백인이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 이방인이 비즈니스가 아닌 루트로 방문하게 되면 주로 서비스업 종사자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장은 백인 남자처럼 우아하게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고 뉴욕타임스를 한 장 넘겼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뉴욕타임스를 읽는 시늉을 하며 남자를 따라하자 순간 백인이 된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데이지와 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한 기분이었다. 장은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노천카페를 나왔다.  -187p


영국 여성인 올리비아 랭도 그래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외국인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호기심이나 배려를 기대하려면 상류층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유있는 커뮤니티에 자연스럽게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역시 같은 아시아계 여성이라도 길에서 전도하시는 분을 믿을 수는 없다. 젊은 한국인 여성들과는 짧고 재빠른 프로파일링으로 적당한 동맹을 형성할  있지만 정체불명의 유색인종 여성들을 무작정 믿을 수도 없다. 워싱턴 버스 사건* 이후로 모르는 사람과  마디 이상의 대화를 해보지 않았다. 옛날 브루클린에서 만난 흑인 언니는 정말 근사했지만 어쩌면  또한 여유있는 계층이라 가능한 것일지도.



*워싱턴 발 애틀랜타 행 메가버스 정류장에서 스몰토크를 나누던 히스패닉 언니가, 캐리어도 아닌 잔짐을 잔뜩 든 채 (비닐봉지 4개라서 기사님이 수하물 칸에 안 넣어줌) 지정좌석인 내 자리를 사전 동의없이 차지하고 본인의 원래 좌석인 옆자리에 앉으라길래 영어로 매우 화를 냈었다.


장은 브라이언이 나간 후 생수를 사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늙은 백인 여자와 조금씩 젊음을 잃어가는 동양인 남자가 창문에 보였다.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자 남자도 가만히 장을 응시했다. 욕망으로 가득 찬 눈빛. 낯선 남자가 금방이라도 창문을 젖히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196p


장은 훨씬 고독했을 것이다. 나의 데이지와 줄리아가 그러했듯이. 그들은 실제로 남성이기 때문에 한국이나 모국에서 누리는 1등 시민의 특권을 몰수당한 기분일텐데, 스스로 그 특권을 자각하지 못했다면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남자 데이지의 고독으로부터 도망쳐, 남자 줄리아의 고독에 안착했다가, 그마저도 내게는 버겁다고 결론을 내렸다.



왜 자꾸 여기서 사진을 찍냐며(2016)


한국에서 지내던 것보다 해방감을 느낀다고 해서, 미국의 1 시민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강등된 (글로벌 엘리트인) 그들의 처지를 보듬어주기에는  코가 석자였다.


마거릿의 배려는 때때로 장을 감동시켰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타자성을 모른다. 게이인 아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고, 어울리는 여자 친구들도 속물적이다. 그녀 자신이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인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점이 자꾸 게리 코스프레를 유도하는, 남성이 그랬다면 적어도 변태라는 말을 들었을 행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녀가 중심 서술자 아니기에, 다정한 동시에 이기적인 사람인 이 정도의 이중성 만으로도 충분히 현실감이 있다.


사실 '장'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그런 비루한 자신을 '다 알면서도' 안아줄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236p, 작품 해설(임지훈)


이방인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오랜 시간을 보냈을 저자의 막막한 시간들이,  간결하지만 심오한 작품으로 결실을 맺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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