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사실주의 2023 앤솔로지
다들 똑같은 마음인 거지. 일하러 왔지만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삶이 더욱 골치인 것은.
-117p, 광합성 런치(이서수)
평범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가들의 모임. 비정규직, 자영업,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은 물론 가사, 구직, 학습 등도 모두 우리 시대의 노동으로 보고 지금 한국사회의 노동 현장을 치열하게 쓰고자 한다.
<월급사실주의 2023>이 흥행해서 매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열한 명의 소설가가 '직접 겪고 느끼고 써내려간' 각자의 변두리, 각자의 불안과 밥벌이의 고단함을 계속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젊은 근희의 행진>으로 젊은 작가들과 한국 소설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투명해진) 다짐을 볼드체로 일깨워 준 이서수 작가 덕분에 월급사실주의를 알게 되었고 동인을 제안한 장강명 작가는 <책 한번 써봅시다>와 <당선, 합격, 계급>을 통해 문장문장 씹어먹었던 스승이다.
이번 앤솔로지를 통해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어보게 됐다. 무려 화자가 90년대생 여성(남주가 내 또래 남성)이다. 실망할까봐 살짝 겁을 먹기도 했으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읽어본 작가 4명-서유미, 이서수, 임성순, 장강명의 작품도 흡족했으나 (읽은지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흐릿해졌고) 이번 작품집을 통해 처음 읽어본 주원규, 최영, 황여정 작가의 향후 활동이 기대된다. 김의경, 염기원, 정진영, 지영 작가의 작품은 내 경험의 한계 혹은 과잉이 몰입을 방해했을 뿐 작품의 깊이는 충분했다.
테마소설집 <사랑의 책>과 <빛 혹은 그림자>가 심하게 취향을 저격했었다. 부작용이라면 왠지 낯선 작가들과 걱정스러운(?) 주제의 앤솔로지를 시도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많이 (나 혼자) 친해진 작가들이 모여있는 수상작품집의 문턱이 낮아진 편이다. 그러나 이서수와 '월급사실주의'라는 키워드(싱크대 사실주의를 패러디함)와 장강명이라면 소장가치는 충분할 것이라 판단했고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다.
여러 작가를 한 책으로 만나고 나면 이 작가들의 솔로 작품 혹은 다른 앤솔로지로 연결이 되고, 그 책에 등장하는 책이나 함께 묶인 다른 작가로 다시 연결이 된다. 우연히 소환한 작가가 신간을 막 냈거나, 리뷰 직후에 수상을 하기도 했던 책무당벌레(?)의 감으로 이 책은 곧 역주행하지 않을까, 또는 반응과 상관없이 작가들의 뚝심으로 매년 발행하고 고정팬을 확보하지 않을까, 라고 점을 쳐본다.
그만둔 지 십오 년이 지났는데도 자신은 안정적인 세계에 속해 있지 않고 바쁘게 걸으며 어딘가에 도달하려 애쓴다는 기분이 몰려오는 순간이 있었다.
-58p, 밤의 벤치(서유미)
이제 너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뭘 그렇게 반가운 척해, 하는 표정으로 눈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다.
-198p, 간장에 독(장강명)
우회전, 좌회전, 불법 유턴, 인도 침범, 오토바이 금지 도로 질주를 반복하면서 맥스웰 커피믹스의 뒷맛이 희미해질 무렵이면 나는 붉고 비릿한 야경만 남은 서울의 자정에 돌입한다.
-253p, 카스트 에이지(주원규)
이곳에서 어떤 친절은 배려의 반의어였고, 어떤 고립은 구원의 동의어였다.
-286p, 오늘의 이슈(지영)
그런데 관둔다는 얘기를 오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오늘 통역까지는 마무리하고 내일 출근해서 말하는 게 나을지 고민이 되었다. 그만두는 마당에도 그랬다.
-319p,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최영)
무수한 물음들이 있었는데. 한 번도 묻지 않은 것들을 묻게 되었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되었는데도, 고작 그런 말을. 마치 그 말이 내 것인 양. 내가 찾아내고 내가 가닿은 진실인 것처럼. 확신에 차서. 그 확신이 모든 물음을 차단시키는 줄도 모르고. 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니까 그런 부주의하고 근본 모를 말을 한 것이겠지만요.
-371p, 섬광(황여정)
소설 주인공 중에 '작가'가 너무 많아! 라고 생각한다면 당장 이 책을 집어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