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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18. 2024

닮아서, 닮지 않아서

단편소설 <나머지정리>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일까. 표고는 늘 궁금했다. 어떤 두 사람에게 닮은 점이 별로 없다면, 너무도 많은 다른 점이 끊임없이 충돌할 것이다. 어떤 두 사람에게 닮은 점이 너무 많다면, 그 수많은 닮은 점으로 경쟁하게 되지 않을까. 처음에는 공통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누가 더 열정적인가, 누가 더 재능이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존재감이 충분하게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냉소적 버전의 표고는 서로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관계가 소모적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박애적 버전의 표고는 교집합이 서로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바라본다. 무엇보다도 그 한 사람, 온전하게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개인이 자급자족하는 상황에서 때로는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하기 벅차고 잠깐 숨 좀 돌리려고 하면 이내 스스로가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 부단한 수양을 통해 어느 정도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성장을 거듭한다고 해도 그때쯤 속으로 곪아있을지 모른다.




표고는 한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상을 등지다시피 지냈다. 구세계의 인연이 그녀를 소환해도, 구세계의 또다른 인연이 활동범위를 제한했다. 인간관계의 깊이가 없어도 되는 간헐적 전시 활동으로 창작욕구를 분출했지만 더이상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한 희노애락과 불안한 공존은 없었다. 조금만 더.


발을 뻗어볼까 생각해봤다. 생각만 해도 에너지가 소진됐다. 지금 걸쳐놓은 일만 집중해도 체력이 부족했다. 체력소모가 큰 일을 하면, 기초체력이 함께 늘지만 계속 해야할 명분이 있어야 계속 할 수 있다.


예술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체계가 있어야 하고, 인풋과 유지비와 시장성이 있어야 한다. 그냥 좋아서 할 수 있으려면 누군가가 물심양면 아낌없이 지원하거나, 말 그대로 미쳐야 한다. 좋아서 미치고, 미칠만큼 재능있고, 미쳐있는 동안 버틸 수 있는 정신력이 있어야 한다. 은둔하는 동안 자신없던 기술을 죽도록 연습했다고 해도, 그 기술이 포함된 작품이 인정받거나 팔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혜리와 지우는 결혼과 출산을 한 뒤로는 마치 처음부터 예술과는 상관없던 사람처럼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렇지 않은 여성들도 있지만, 누가 있더라...


표고와 아직까지 친분을 유지하면서 서로의 작품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여자친구들은 대부분 싱글이다. 결혼한 언니들은 연락을 하거나 작품활동을 하더라도 약속을 잡아서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건 꼭 예술가와 전직 예술가, 혹은 쉬고 있는 예술가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거대한 문제다.


시간이 지나면 성비도 달라지고 공감대를 유지하는 사람이 크게 줄어든다. 모든 구역이 어느 정도는 그렇다. 표고와 같이 아동친화적인(?) 싱글 여성이라고 해도 육아전선에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은 쉽지 않다. 뭐랄까. 원래도 많이 배려하려고 노력하지만 배려는 기본이고 그 이상의 노력을 해야 유지되는 관계? 상대방의 애정이 충분해도 왠지 폐를 끼치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니까, 배려는 내가 하는데 미안한 것도 내 쪽이다. 육아로 분산되어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것에 미안함을 표하는 친구도 있다. 그 미안함은 또 거절해야 한다. 그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여전히 거대한 문제다. 모두에게 미안해하면서 본인은 본인대로 소모하는 삶이란, 보다 존중받아야 마땅할텐데.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싱글이었던 영신은 표고를 부러워했을지는 몰라도 시샘하지 않았다. 말 못할 컴플렉스는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적어도 표고와 자신을 비교하는 암시는 없었다. 어느 정도 표고와 비슷한 영신에 비해 오히려 표고가 갖고 싶은 것을 더 많이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연수는 반대로 표고가 가진 것에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를 표했다.


표했다는 것은 사무치지 않았다는 의미다. 표했던 사람들은  시샘을 인정할 정도로 각자의 차이를 인정했고, 자신의 부족함에 대범했다. 문제가 생기는 쪽은 표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부럽지도 질투하지도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미워하는 사람들. '내가 너를 ?'라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오히려  반대를 의심해볼 만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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