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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Jul 05. 2024

헨리 제임스 뺨치는 강화길 맛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192p


​이 소설을 간과하려는 당신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고딕풍으로 말하자면, 귀신 들린 집이 입주자를 고르듯, 이 이야기가 당신을 선택할 것이다.

-추천사(신형철)




이 소설을 간과하려는 나의 시도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나 고딕 좋아하네? 시즌이기도 했던 작년 여름, 헨리 제임스 원작의 <블라이 저택의 유령>과 영화판 <레베카>를 보고, 여성작가 고딕선 <공포, 집, 여성>과 문제작 <화이트 호스>를 읽었으나 강화길의 '한국판 고딕'에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정주행을 결심하지 못한 채 기나긴 리뷰를 브런치에만 남겼다. 해가 넘어가는 동안 수없이 마주쳤던 <대불호텔의 유령>을 애써 모른척(해야만)했다. 그러다 <젊은작가상 10주년 기념 특별판>(이하 <특별판>)이라는 요물같은 책을 만나 또 한 번 나사처럼 조이는, 헨리 제임스 뺨치는 강화길 맛에 몸서리를 쳤다.


첫문장까지는 아니어도 첫문단에서 사로잡는 작가가 있는가하면, 첫인상이 수수했다가 '돌아오고, 돌아오고, 돌아오는' 작가가 있다. <특별판>에 수록된 강화길의 단편(이야말로 201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이 아닌가!)이 귀신처럼 '씌었다'. 일명 '덕통사고'라고 해야하나. 며칠 후, 오랜 밀당(?)을 집어치우고 강화길에게 충성(?)하기로 남몰래 맹세하며 당연히 <대불호텔의 유령>을 구입했고 뒤표지(추천사)의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줄은 정확하게 이 상황을 예견했음을 증명했다.



이 이야기가 당신을 선택할 것이다.



여러 겹의 액자에 둘러싸였으나, 액자의 프레임도 액자 속의 진실도 그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 다만 사랑이었다고 하기엔 그 열매를 손에 쥐기까지 너무도 많은 (심리적) 고난을 겪어야만 하는 이야기. 귀신이 씌인 것처럼 환청이 들리고(익숙한 내면의 소리, 내 안의 까탈스러운 시모, 빌어먹을 메타인지) 썸남이 알려준 귀신의 집에는 소름끼치는 비밀이 있었는데....




아니, 거짓말이다. 나는 그렇게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엄마는 거짓말쟁이나 이기적인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그런 애였다. 모르겠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게 가능하긴 한가. 이렇게 묻는 건 비도덕적인가. 쓰레기 같은 짓인가. 그래? 그때 나는 쓰레기 같은 짓을 했다. 그곳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독한 여인이 말라죽어간 허름한 집을 말이다. 그 비극의 장소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차 있겠지. 보고 싶다. 그걸 느끼고 싶다. 아니, 이것도 진실은 아니다. 솔직히 모르겠다. 대체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46p


​내 곁에 머무르고 있는 좋은 사람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그 우정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반면 사랑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과연 사랑이라는 게 있긴 한걸까? 잠깐의 감정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저 안정되고 싶기 때문에, 안심하고 싶기 때문에, 순간의 얕은 감정을 너무 깊이 받아들인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휘말리게 되는 것. 그게 연애가 아닐까? -63p


​그건 영원한 사랑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랑. -297p


되풀이되는 기억 속에서 귀신처럼 들러붙어 계속 나타나는 사람.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않은 사람. 그래. 바로 그가 내 옆에 있었다.

-음복(강화길), <화이트 호스>


돌아온다네. 돌아온다네. 돌아온다네!

-화이트 호스(강화길), <화이트 호스>



<화이트호스> 2023년 리뷰




https://brunch.co.kr/@swover/222



물음표와 질문이 많은 소설에 미쳐있다. 문제집덕후의 직업병일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단언'이 어울리지 않고 '당연'한 것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와 열린 결말은 선택이 아닌 필수일지도 모른다. 이미 너무도 알려져서 꿀팁(?)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것들. 그러니 이제 각자의 '의심'에 충실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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